돌봄의 집안 내력 1

-큰이모 이야기

by 이마음

엄마는 늘 집에 있다. 10년 동안 같이 살던 강아지 쁨이는 주기적으로 산책을 나갔지만 엄마는 강아지 쁨이보다 외출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도 겪고, 가끔은 어렸을 적 기억나는 전쟁 일화를 이야기 하기도 하는 엄마는 아빠를 아는 어른의 소개로 만났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했다고 한다. 10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엄마는 위로 오빠 한 명,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 각각 한 명 어렸을 때 병사해서 7남매로 자랐다고 한다. 가장 첫째였던 큰이모는 엄마가 26살이었을 때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맏딸이 맏아들과 결혼해서 삼 남매를 낳고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사셨다. 큰이모의 시어머니는 아흔이 넘도록 사셨는데 몇 해 동안은 나의 외할머니와 같이 사시면서 큰이모의 돌봄을 함께 받기도 하셨다. 큰이모는 맏딸로서 자식들을 다 키워서 출가시키고 또 그들이 자녀를 낳고도 시어머니, 그리고 친정엄마를 돌봤다.

큰이모는 엄마와 전화통화를 자주 하셨는데 매번 "죽는 날이 내 날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요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는다. 죽기 전까지는 그 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있어야 하며, 해야만 하는 일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롭게 편안히 쉴 수 있는 날은 바로 죽는 날, 죽음 이후라는 뜻이라는 것을. 큰이모는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로 기억을 잃고 집에서 요양보호사와 째 딸에게 돌봄을 받다가 결국 요양원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잠시 지내셨다.

큰이모가 요양원에 계셨을 때 한번 엄마와 가 본 적이 있다. 식사도, 거동도 잘 못하고 말도 잃은 초점 없는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큰 이모를 보며 손 한번 잡아 드리고 나오는데 누워서 상체를 일으키며 나가는 우리를 보려고 했던 게 큰이모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모는 맏딸로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오래 남았던 같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엄마는 빠듯한 살림에 선뜻 하라고 말을 하지 못했지만, 큰이모는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시키라고 엄마한테 말씀하셨다고 한다. 직접은 아니었지만 늘 그렇게 마음으로 지지해 주셨던 큰이모는 지금 안 계시지만 엄마와 자주 이야기하면서 떠올려 보곤 한다. 큰이모부도 살아계실 때 나에게 묵직하게 던진 한마디가 있었는데 들어드리지 못했지만 문득문득 생각이 나곤 한다. "나 살아 있을 때 너 시집가는 걸 보고 싶다."라는 말씀.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보다 결혼을 한 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저울질했었다. 결혼을 해서 나 자신보다 가정을 우선하며 살게 될 미래의 나보다 결혼하지 않아도 잘 살고 있다고 여기던 그때의 내가 난 더 소중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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