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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숨, 숲

<2025년 사이펀 겨울호>에 실림

by 최웅식

아리스토텔레스와 숨, 숲

최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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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숨에게 괜한 말을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밝혔으나 숨은 먼 하늘만 바라봤다 숨은 숲의 공기를 떠올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렉산더의 개인 교사가 되었다 숨은 산에 들어가서 숲의 호흡을 배웠고 동식물을 만졌다

2

코끼리를 데리고 온 알렉산더는 정복자를 떠올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미개한 종족들에게 이성의 힘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전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펜촉 러시아의 혹한에 밀려 코끼리가 알렉산더의 군사를 밟았다 대왕을 견제한 귀족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독살하기로 했다 숨은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위, 돌집, 동굴이 그의 집들 숨은 동식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뱀을 미끈하게 돌아다니는 아슬아슬한 독, 화가 나면 허리를 곧추세우는 버릇, 가만히 귀 기울이면 쉭쉭거리는 소리라고 불렀다 숨은 긴 이름을 노트에 적었다 숨은 숲의 흔들거림과 나무들의 소리, 풀의 춤을 기록했다

3

숨의 몸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유연했다 매의 눈을 좇던 눈동자가 산속으로 들어왔다 눈동자는 숨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눈동자는 숨에게서 사람의 발은 나무의 뿌리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다 숨은 눈동자에게 이름을 짓는 방식을 소개했다 눈동자는 숨을 흉내 내며 매의 이름을 붙였다 매는 날랜 야성의 눈, 하강하는 부리, 땅을 바라보는 얼굴이라고 했다

4

스승을 추적한 제자들이 빈 섬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찾아냈다 육십 삼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이 든 술잔을 들이켰다 숨은 자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 나무뿌리에 묻어주라고 했다 눈동자는 숨의 두 눈에 입맞춤했다 눈동자는 숨이 기록한 숲을 읽었다 노트의 제목은 숨의 체온으로 숲을 이룬다, 였다 눈동자는 숨의 노트를 품고 산에서 내려갔다 마을로 가서 알려야겠다는 속삭임이 눈동자의 걸음걸이에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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