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는 아름답다

영화 <은교>

by 아륜

은교를 여러 번 관람했지만 읽기는 처음이다. 읽다 놀랐다. 문장이 아름다워서. 처음 펼쳤을 때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소설을 나는 신뢰한다. 은교는 예뻤다. 시인의 말대로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삶의 생기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나.

영화 은교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고 소설 은교를 몰랐으며 혼자 봐야 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 그렇게 은교를 사용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색, 계>를 슬프다고 느꼈을 때처럼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을 했다. 소설을 덮자마자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과연 영화가 이 이야기를 흉내 낼 수 있는지 코웃음 치며 영상을 틀었다. 영화는 그러나 강력하다. 쭈그러진 모습을 거울에 비추는 노인의 장면 뒤에 나오는 햇살 아래 은교는 얼마나 눈부신가. 햇볕보다 맑은 그 모습이 은교라는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은교는 외로웠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매질했다. 동생이 둘이고 살림을 도맡아 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남자도 만났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시인 할아버지는 아빠처럼 듬직했다. 고등학생 은교가 짊어져야 했던 생의 무게는 버거웠다. 이적요 앞에 가면 어린아이가 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엄마나 여성의 역할을 지우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 주는 유일한 남자였다. 은교는 이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노인과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다. 은교는 서지우를 경멸했다. 경멸했지만,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이적요에게는 젊음 빼고 다 있었고 서지우가 가진 것은 젊음뿐이었다. 은교에게는 젊음이 무거웠고 이적요에게는 젊음이 절실했다. 은교는 이적요를 사랑했고 서지우는 이적요 시인을 사랑했다. 이적요는 서지우를 사랑했고 은교를 아꼈다. 영화는 제자 서지우와 스승 이적요의 끈질긴 사랑을 덮어둔 채 어린 은교와 나이든 시인의 플라토닉 사랑을 보여주었다. 책의 구성과 달랐지만 영화에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추잡한 뉴스가 뜬다. 배우 김고은에게 섹스 경험이 있냐고 물어봤다던 소설가 박범신. 그의 첫 번째 잘못은 이렇다. 원작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내가 쓴 은교를 신인이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할 수 있다. 자기 작품은 소중하니까. 은교가 책 밖으로 나와 뛰어다닐 장면이 기대되니까. 궁금할 수는 있다. 작가의 우려는 이해한다. 원작자는 그러나 다른 작품에 영향을 끼치려 들면 안 된다. 영화 은교는 소설 은교와 다르다. 정지우 감독이 상업영화에 어울리는 각본을 썼다. 소설 은교와 달리 영화다운 해석이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배우는 고등학생 역할을 맡았지만 이미 성인이었다. 두 배우와 베드신이 있고 자신은 전라를 노출한다. 그런 영화다. 경험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영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 만약 없었다 해도, 살인한 적 없는 배우가 사람 죽이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충분히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자네 사랑 해봤나? 은교라는 캐릭터는 말이야, 남자에 대해서 모르면 해석하기가 곤란해. 그래서 묻는 거야.'라고 했으면 나았을 것이다. 소설가 박범신은 가만히 있다가 영화가 완성되면 시사회에서 작품을 관람하면 되었다. 굳이, 꼭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했다면, '우리 은교 예쁘게 그려줘요.'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말뿐이라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여성을 어린 은교, 젊은 은교, 늙은 은교라고 불렀다. 허벅지와 허리를 주무르며 결혼은 했냐 나이는 몇 살이냐 묻는 성추행을 저질렀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이를 알았지만 그의 문장을 읽고 나서 다시 기사를 보니 불편했다. 문장을 예쁘게 쓰지 말든가, 말을 예쁘게 하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지. 독자는 혼란스럽다. 후에 사과랍시고 누군가 나로 인해 기분이 불쾌했다면 사과드리고 싶다? 문학적 재능을 난자한 소설가가 안타깝다.


어쨌든, 내가 읽은 은교는 아름다웠고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은교보다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