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의 마지막 밤, 지서에게 문자를 받았다. 헤어진 것 같아. 나는 우는 모음을 세 개째 입력하다 멈췄다. 헤어질 것 같아,라고 하려다 잘못 쓴 건지 남자친구와 헤어졌단 뜻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지서 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지서는 오랜만에 동네에 오고 싶다며 한 시간 후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작년에 학교에서 맞춘 검은색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묵 국물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따듯한 겨울이었다. 일곱 시까지 오십 분이 남은 상태였다. 나는 학교 쪽으로 걸었다. 필요하지 않을 때도 매주 들른 곳이었다. 재수하는 동안 시간을 얼리려 애썼다. 패배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췄다고 생각했다. 고삼인 동생에게 친구처럼 대해달라 하고는 평일에도 교복을 다려 입었다. 모르고 교복 바지를 서로 바꿔 입는 날도 있었다.
새해를 앞둔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학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수험생으로 한 번 더 살아낸 올해가 끝나갔다. 지서의 일 년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지서는 이학년 같은 반일 때 이미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정해 두었다. 생명과학을 전공할 거라 말하고 생명과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면 한 학기는 친구도 만들어야 하니 그 후에 같은 학교 다른 과 사람을 만날 계획이란 꿈은 그대로 이뤄졌다. 지서는 방학한 날에 사귀고 싶은 사람을 사귀었다. 생각한 대로 착착 앞날로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서도 그랬다. 이성 친구 한 명쯤 두면 좋으니까 우리는 쭉 친구라는 말도 지켜졌다. 지서와 같은 반일 때 지서 생각을 자주 한 적이 있었다. 삼학년이 되면서 나는 다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복도에서 종종 지서를 마주쳤지만 지서가 개념서만 쳐다보고 있어서 인사하지 못했다.
지서가 나올 지하철역 입구로 걸었다. 지서는 지하철만 탔다.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아 시간 계산이 어렵다고 했다. 같이 하교하던 날 나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지서에게 말했다. 버스에서 신호가 걸렸을 때 다른 버스에 탄 사람들 눈을 마주칠 때가 있어. 그때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달라. 보통은 피하고 간혹 가만히 보는 사람도 있는데 안 믿겠지만 손을 흔들며 웃는 사람도 있어. 지서는 믿지 않았다.
유월 시험이 끝나고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 불안해진 후였다. 나는 몇 명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고 지서는 누가 생겼다고 답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정지했고 그때 이후로 처음 연락이었다. 그 사람과 안 좋다는 건가, 나는 텅 빈 주소록을 보며 생각했다.
“다민아, 저녁 먹었어?”
등 뒤에서 지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아직.”
“일찍 나왔네. 십오 분이나 일찍 도착했어. 시간 계산을 잘못 했나 봐.”
“잘 왔어. 밥 먹으러 갈까?”
“무슨 밥이야. 우리 이제 좀 있음 스물한 살이야. 바로 술이지.”
“아는 곳이 없어서.”
“내가 오면서 알아봤어.”
지서가 말을 마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서가 나와 같은 외투를 입고 오지 않았다면 당혹스러운 마음이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열 달 만에 만난 친구와 같은 차림을 하고 번화가로 걸었다. 불빛과 소리로 싸인 건물이 이어졌다. 걸으면서 지서는 나의 입시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로 오늘 술을 많이 마실 거라고만 했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지서가 안내한 술집이 있었다. 이런 델 실내포차라 하는 거란 지서의 말이 끝나고 우리는 가슴에 새긴 학교 이름을 국기에 대한 경례 자세로 가리고 들어갔다. 어느 영화에서 교복 입고 클럽 입장하는 장면 같지 않냐며 지서가 앉자마자 웃었다. 검은 패딩을 옆자리에 벗어 놓고 나란히 신분증 검사를 받았다. 내가 이미 성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지서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음 어묵탕과 소주를 주문했다. 나는 어떤 술이든 마셔본 적 없었지만 맥주가 나을 것 같아 맥주를 추가로 시켰다. 지서가 큰 잔을 기울여 맥주를 따르고 작은 잔에 소주를 채웠다. 나는 술을 받는 법을 연습할 기회가 없었다. 지서의 조그만 잔과 나의 커다란 잔이 부딪혔다. 내 앞에 놓인 노란 술 위에 뽀얀 거품을 한 모금만 마셔보았다. 지서가 투명한 술잔을 반쯤 비우고 크으흐아으 하는 소리를 낼 때 나에게서도 같은 소리가 나왔다. 콜라처럼 톡 쏘고 시원한데 단맛은 덜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지난 일 년이 쑥 내려가는 듯한, 한 모금을 마시고, 깊은 대접에 숟가락을 푹 넣어 뜨끈한 국물을 떠먹었다. 두 모금, 세 모금 연이어 마시면서 목에서 배까지 이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지서와 두 번째 건배를 하고 마침내 첫 잔을 비우고 보니 내 잔이 너무 커서 어린애같이 보였다. 지서 쪽에 놓인 나머지 소주잔을 가져와 지서에게 내밀었다. 지서가 오오, 다미이이인, 다 컸는데, 하며 내 인생 첫 번째 하얀 술을 따랐다.
“잠깐. 여기 얼큰한 김치찌개에 공깃밥 두 개 주세요.”
지서가 찌개를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지서의 얼큰한 표정에 웃었다.
“메뉴 이름이 얼큰한 김치찌개야. 얼큰한 얼큰한 김치찌개 주세요, 하려다 말았어.”
“좋다. 술 마시는 거.” 내가 말했다.
곧 김치찌개와 밥, 서비스로 달걀말이 네 조각이 나왔다.
“잔 들어. 얼큰한 국물 준비됐어.” 지서가 말했다.
나는 지서와 똑같은 크기의 잔을 부딪치고는 한 모금을 꿀떡 삼켰다. 눈이 절로 찌푸려지는 쓴맛, 맥주가 경쾌하다면 소주는 차라리 후련했다. 모든 게 다 풀려 내려가는 몸의 느낌이 즉시 감정이 되었다. 지서가 처음 입을 떼는 아기를 보듯 국이 담긴 수저를 건넸다. 그다음은 샛노란 달걀말이 한 조각. 그사이 지서가 주문한 얼음물이 앞에 놓였다. 물까지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그제야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은 어때?” 내가 물었다.
“어려운데 재밌어. 넌 이번에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지서가 물었다.
“합격했어.”
나는 미리 찍어둔 합격자 조회 화면을 지서에게 보여주었다. 지서가 손뼉을 치며 건배를 제안했다.
“사회학은 뭐 공부하는 거야?” 지서가 물었다.
“사람. 사람들.”
“나도야. 사람보단 넓지만.”
“너희 학교도 가고 싶었는데 어쨌든 잘 됐지 뭐.”
“우리 학교랑 가깝네. 학교에서 만나도 되겠다.”
지서와 서로의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잃은 일 년이었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나와줘서 고마워.” 지서가 말했다.
“오늘 열두 시까지 있을 수 있어? 스물한 살 맞이하고 싶어서.” 내가 말했다.
“그럴게.”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마신 술이 세 잔이었나 네 잔이었나, 다 무거워졌다. 먼저 눈꺼풀이 그다음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는 발음을 하는데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자음에서 모음에 닿는 간격이 멀어지고 모든 게 느려졌다. 부서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지서와 눈을 더 길게 맞추고 자주 웃게 되었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지서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풀어 볼을 가리고 두 눈을 비볐다.
“지서야, 왜 그래?”
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서 옆자리에 있는 패딩을 내 자리로 옮기고 지서 왼쪽으로 가 앉았다. 일자로 뻗은 머리가 지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머리카락을 왼쪽 귀 뒤로 넘겨보았다. 아홉 시가 넘어가면서 손님이 많이 들어왔다. 나는 우는 친구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배운 적이 없었다. 지서의 머리를 원래대로 늘어뜨리고 어깨를 내주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었다 헤어지면 어떤 마음일지 궁금했다.
“오늘 술 많이 마시고 싶었던 이유 때문에 그런 거지?” 내가 물었다.
“하나는 그거고 하나는 딴 거야.” 지서가 말했다.
“뭔데?”
“이제 스무 살 끝났잖아. 한 번뿐인 시간이 사라진다는 게 슬퍼.”
“그럼 나도 같이 울어야 하는데.”
“너도 울어.”
“그럴까?”
“울지 마.”
“너가 우니까 나도 울고 싶은데.”
지서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나는 발간 눈에 발간 코, 발간 입을 바라보다 정말로 따라 울 것 같아서 나가자고 했다.
밖에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내렸다. 올해 처음 맞는 싸라기눈이었다. 그새 바람이 식어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우리 담배 피울까?” 지서가 물었다.
“피울 줄 알아?”
“아니.”
“펴 볼까?” 내가 물었다.
“아니. 학교에 산책가자.”
우리는 각자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이쪽 길을 걸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걸으면 안 될 것 같은 길이었다. 어른의 거리, 어른의 쉼터, 어른의 비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옮겨 어른의 골목을 통과했다.
학교 근처에 도착할 때쯤 올해는 한 시간 하고 십오 분이 남았다. 눈이 쌓이지 않을 만큼 내렸다. 캄캄한 언덕을 올라 정문에 다다르니 문이 잠겨 있었다. 지서가 교문을 등지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나도 따라 지서 왼쪽에 앉았다.
“너의 스무 살은 어땠어?” 지서가 물었다.
“잃어버렸지. 잃었지만 사라진 건 아니야.”
“그럼 어디에 있어?”
“분실물 보관소에 간직하고 있어. 나의 스무 살은.” 내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어?”
“너가 오늘 많이 찾아줬어.”
“내가 나머지 찾아 줄까?”
“어떻게?”
“우선 머리를 좀 묶어 줘. 머리가 길어서 방해될 거야.”
지서가 머리끈을 손에 쥐여 주고 뒤돌아 앉았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정말 몰라?”
나는 손가락 사이에 머리끈을 끼우고 지서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았다. 머리끈으로 머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팽팽하게 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 헐겁지만 하나로 묶은 머리가 완성되었다. 머리를 올려 묶어 표정을 드러낸 지서가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부서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시간이 멎었다. 나는 어느새 스물한 살이 되어버린 우리를 눈감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