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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륜 Jun 16. 2021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곧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

<고통 없는 사회> – 한병철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저자의 문장이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형용 모순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고통을 의학이나 긍정심리학에만 맡겨 마취하고 통증을 제거하는 데 급급한 순간, 생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이 문장으로 책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문장이므로 글의 제목은 나의 문장으로 썼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곧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나는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앉는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일과 결과적으로 같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과정이 없다. 고통은 나를 과정에 참여시키며 시간의 주인으로 나를 세운다.      


  나에게 고통이란 게 있을까, 대체로 평탄하게 자랐는데 이런 내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의문은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나의 몫이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견줄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이전까지는 고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사회생활이 고통스럽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면 그건 고통스러운 게 맞다. 고통의 실감은 정상이다. 없애버려야 하는 질병이 아니다. 고통은 특별한 자랑이 아니지만 흉도 아니다. 고통은 나의 시간이다. 나 자체다.      


  고통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십 대 중반 몇 년간 생활한 첫 직장에서 나는 고생했다. 고통스럽게 매일을 살아냈다. 처음 출근한 월요일을 기억한다. 아침 미팅은 경직되고 살얼음판 같았다. 그 분위기에 욕지기를 느껴 중간에 두 번이나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어디 아프냐는 질문에 나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진지하게 방법을 생각하거나 시도한 것은 아니다. 일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사는 따듯한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맛있게 해 준 밥을 먹고 나의 아늑한 방에서 쉬었다. 나는 사랑받으며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고통스러웠다. 또 내일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온몸을 짓눌렀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만두어도 큰일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있고 또 다른 직장에 가면 되고. 동기들이 하나씩 떠났다. 알바를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돈벌이의 고통을 학습했다.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정말, 일이란 고된 것이구나 하는 감각을 체험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으니 울고 술을 마시고 문학과 음악에 파묻혔다.      


  그간 고통을 모르고 컸다면 그건 내게 고통이 주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가 나의 고통까지 책임졌기 때문일 것이다. 노력도 고통도 없는 매끄러운 삶에 한번 상처를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했으니 웬만큼 경력도 쌓고 싶었다. 견딜 수 없었고 그만둘 수는 있었지만 버텨보았다. 버티는 만큼 얻기도 했다. 체력이 생겼다. 인내심과 모험심이 늘었다. 잔고가 축적되었다. 경력의 숫자가 올라갔다. 감정이 가라앉아 차분해졌다. 웬만한 일에 무섭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변화가 즐거웠다. 돌아보면 고통이었다. 고통이었지만 그 안에 행복도 섞여 있었다. 일은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성취도 주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안겼지만 한계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피로가 쓴 만큼 소주는 달았다. 고통이 나를 삼켰고 고통 안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고통스럽다. 아직도 가끔씩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꾸중을 듣거나 사고를 치거나 모욕을 당해 어쩔 줄을 모른다. 고통에서 벗어난 지금, 그때의 고통이 없어 행복하다. 대신 또 다른 고통이 있다.     


  내가 최근 겪는 고통은 글쓰기다. 이상하다. 쓰고 싶어서 쓰는 건데 왜 고통스러운 걸까. 행복하려고 쓰는 거면서 고통스럽다니? 글을 쓰면서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을 통감한다. 이전의 고통은 행복한 고통이라고는 못하겠고 의미 있는 고통이라 하겠다. 지금의 고통은 완벽히 고통스러운 행복이다. 얼마 전 엄마의 질문에 답하면서 깨달았다.     


  이번에 엄마가 처음으로 나의 소설을 읽었다. 몇 년 동안 글을 쓴다는 건 알았지만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도 따로 보여드리지 않았다. 책을 만들어 엄마에게 주었고 며칠에 걸쳐 끝까지 읽었다고 했다. 몇몇 인상 깊은 설정에 대해 말하면서 엄마는 소설 쓰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글도 좋은데 엄마는 엄마니까 이걸 쓰면서 내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딸이 판타지 같은 걸 쓰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판타지 장르소설도 똑같이 글쓰기이고 모든 글은 고통일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글이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는 역시 엄마구나, 쓰는 고통을 알아주어 위로가 되었다. 밝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은 결핍과 상실, 상처, 슬픔, 외로움 그리고 어루만짐이다. 나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가 장편을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언젠가 장편을 쓸 생각이다. 1~2년 정도를 통째로 아무런 걱정 없이 몰두할 수 있을 여유와 그만한 주제가 생기면 아마도, 십 년 안에는 써보고 싶다. 초밥집에서 엄마가 글썽이는 눈으로 지난 시간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말을 건넬 때 나는 연어를 내려놓고 간신히 감격을 참았다. 건조한 눈으로 생각을 해 봤다. 답은 분명했다. 소설을 쓰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럽고 외로웠지만, 가장 행복했다.      


  가만히 있는 나를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시 주저앉고 또 일어나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행복이다. 내가 선택한 살아감이다. 씀은 씀 자체다. 읽는 이의 마음을 건드리면 좋겠고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씀 이후의 것이다. 앞날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보장된 결론이 없다. 그저 이대로 존재한다. 삶은 살아냄이다. 완성형이 아니다. 과정이다. 살아내는 시간의 연속이다. 살아낸 결과물이 아니다. 삶은 살아 있는 상태 그 자체다.      


  쓰고 싶어서 쓰는 건 맞는데,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다. 쓸 수밖에 없다. 이유는 모른다.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일단 주저앉았다가 일어나본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사색하고 글로 표현하는 것. 이걸 원한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어버린다. 사람과의 대화를 좋아하면서 자꾸만 혼자 있기 원하고 그러면서 외로워하고. 이런 모순된 성질이 선천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타고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렇다면 받아들여야만 한다.     


  책에서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고. 고통 없는 고통을 상상해본다. 고통이 떠난 자리에 나는 무엇을 채워 넣을까. 채워 넣을 것이 남아 있을까. 행복을 꽉 채울 수 있을까. 행복이 곧 고통이고 고통이 곧 행복인데. 장점이 곧 단점이고. 사랑이 곧 미움인데.

     

  ‘고통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향이야말로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고통은 새로운 것의 산파이자 완전히 다른 것의 조산사다.’     


  이처럼 고통은 새로운 고통을 낳고 계속된다. 계속되도록 만들어준다. 타인과의 차이는 고통이다. 고통은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타자를 받아들이고 체하고 토하고 마침내 소화하면서 나는 새로운 내가 된다.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고 나는 신음한다. 고통 속의 내가 고통 속의 타인을 만나면 고통 속의 우리가 된다. 우리는 그냥 나와 너로 안락하게 부유하는 것보다 단단해진 우리가 된다. 우리는 비슷한 옷에 다른 번호를 달고 달린다. 결승점에 골인하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기 위해서 달린다. 끝에 다다르면 상장과 메달이 나오고 박수 소리도 커질 것이다. 그것만을 위해 달릴 수는 없다. 달리는 동시에 나는 보상받는다. 몸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가뿐해진다. 죽고 싶은 동시에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 고통스럽지만 견딜 만한 고통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고통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다. 내가 무너졌었고 다시 일어났다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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