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혼자 사는 여자에게 추천받은 책이다. 19호실은 책의 마지막에 위치했다. 다른 단편들을 다 읽을 때까지 참지 못하고 곧장 19호실로 갔다.
19호실은 수전이 매일 낮에 낡은 호텔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오는 자기만의 방이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두꺼워서 아직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19호실의 의미를 헤아린다.
수전은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으면 했다. 더러운 호텔이어도 상관없었다. 수전에게는 천국이었다. “내가 있는 곳을 당신이 알아낸 순간부터 그건 의미 없는 일이 됐어.”라는 대사는 그래서다.
수전은 호텔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내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자유가 필요했다.
3년 전이었다. 두 번 이런 적이 있다. 삼청동 그리고 서울대입구. 봄날이었다. 주말 오전에 갑자기 나가고 싶었다. 집에 있던 커다란 바게트를 챙겨 나왔다. 지하철에 앉아서야 목적지를 정했다.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물론 나와의 약속이었다. 저번에 봐 둔 전시 정보를 떠올렸다. 그곳으로 갔다. 오랜만에 찾는 삼청동의 미술관. 어느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 전시를 두 시간 정도 보았다. 그곳에 메모도 남겼다. 꿈을 묻는 종이에 십 년 후에 작가가 된다고 썼다. 무료 전시인가 했다. 전시를 다 보고 연결되는 통로로 나가니 리허설 중인 공연팀이 보였다. 음악을 좀 듣고 입구로 나가려는데 그제야 매표소가 보였다. 이상하다, 나는 그냥 들어갔는데 몇천 원의 입장료가 있었다. 어쩐지 뒷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막혀 있어야 할 통로가 뚫린 틈을 타서 모르고 쏙 들어가 버린 거였다. 후불도 웃기고 도망치듯 나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밖은 더웠다. 카디건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길을 걸었다. 바게트를 왼손에 쥐고 먹다가 목이 타서 주스 가게로 갔다. 서너 명이 줄 서 있었다. 나는 수박주스를 주문했다. 컵이 꽤 컸지만 오 분도 안 되어 다 먹었다. 뱃속이 시원해진 나는 좀 더 걸었다. 길거리에 예쁜 소품들이 늘어졌다. 내 손으로는 빵을 먹고 땀을 닦아서 예쁜 물건을 만질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땀을 흘리며 걷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삼청동이 먼저인지 여기가 먼저인지. 서울대입구역으로 갔다. 이십 대 초반에 친한 친구가 있어 자주 찾던 곳이다. 그곳으로 가니 어려진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아주 커다란 카페에 갔다. 따듯한 차를 주문해서 책을 한 시간 읽었다.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더 있다 와야 하는데 혼자 나오니까 또 집에 가고 싶었다. 옛날 생각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삼청동에 간 일은 아무도 모른다. 서울대입구에 간 일은 이 책을 추천해 준 여자만 안다. 아무도 모르게 다른 동네에 다녀오고 싶은 날이 있다. 혼자 떠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차를 마시면서 책 읽는 일 정도다. 누가 알아도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두에게 몰래 다녀왔다는 그 사실이 의미 있다. 나는 그날 카페에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흐려졌는데 조용히 눈을 계속 닦았던 기억이 있다. 왜 그랬을까.
모른다. 나는 동네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뭘 하지 않아도 그저 훌쩍 잠깐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이 좋다. 시간도 짧고 거리도 가깝고 뭘 해 봤자 커피를 홀짝이는 것뿐. 하지만 모두에게 비밀이라는 사실이 좋다. 정신적인 나만의 방은 꼭 필요하다.
소설을 쓰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여서 외로울 정도가 되었다. 저녁에 비가 그치면 산책을 나가야겠다. 아무도 모르는 음료를 손에 들고 몰래 듣는 음악을 머리 위로 쓰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