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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륜 Sep 29. 2021

나의 작은 숲을 지키기 위해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영화를 봤다. 끝없는 직장생활 중 일찍 퇴근한 어느 날 극장을 찾았다. 그날 나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체험했다. 종일 건물에 갇혀 지내다 스크린으로나마 자연에 파묻힌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일주일이 되기 전에 다시 영화관에 갔다.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 속에 들어가 푹 쉬었다. 두 번째 보면서 건강한 음식을 먹자고 다짐했다. 음식을 만들자는 생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한동안 출퇴근을 하지 않게 되었고 요리를 시작했다. 이번에 영화를 볼 때는 음식에 주목해서 봤다. 혜원이 만든 음식은 내가 맛볼 수 없으니 만드는 과정에 눈이 갔다. 직접 재배한 재료로 하나하나 만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예쁘게 차린 다음 맛있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먹을 때 보기 좋았다.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즐거웠다. 혜원의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그렇다면 혜원이 특별히 삶을 소중히 하는 사람일까? 혜원은 진로를 위한 학업이나 밥벌이를 위한 노동을 하던 서울에서 벗어나 있었다. 돌아온 곳은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이 묻어 있는 공간이다. 자기 집이니 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소중한 친구들도 함께였다. 혜원에게 고향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엄마 덕분이다. 남편이 떠난 뒤에도 그 집에 남아 신기하고 맛있는 요리를 매일 만들어준 엄마. 딸이 성인이 될 즈음 혜원의 엄마는 시골을 떠나 자신의 남은 삶을 챙기러 갔다.    

  

  영화에서처럼 재배까지 안 하더라도 음식을 만드는 일은 고단하다. 일단 장보기부터 해야 한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대파 등은 나중에 쓰도록 손질해 두고, 재료를 다듬고 익히고 양념을 해서 짠! 하기까지 한 시간이 훌쩍 넘는다. 거기다가 정리까지 포함하면 시간과 체력이 꽤나 드는 것이다.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식재료를 바로 소비하지 않으면 다 버려야 하고 또 비용이 든다. 그러니 조리를 생활화할 상황이 아니라면 사 먹거나 시켜 먹는 편이 낫다.      


  잘게 나눠 팔아 비싼 식자재로 간단한 조리를 가끔 하는 것 외에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 좀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이후 각종 요리 영상을 두 시간이나 보고 마트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 재료를 정리하면서 이미 나는 지쳐 있었다. 아까 본 영상을 다시 보면서 국과 볶음밥을 따라 해 보았다. 그럴싸한 맛이 났다. 너무 피곤했지만 보람도 느꼈다. 에너지를 다 써서 글을 쓰지 못하고 쉬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 매일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다. 어제 산 식재료를 활용할 만한 음식은 뭘까 고민하다 검색하면 바로 레시피가 나온다. 진간장, 국간장, 굴소스 등도 필요하므로 평소에 집에 없다면 그것도 한 번에 다 사야 한다. 마치 화장을 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화장품을 갖추는 일과 비슷하다. 한번 사 놓으면 추가로 사야 하는 일이 줄어든다. 준비한 재료를 잘 활용해 새로운 음식을 만들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먹으려고 만드는 거니까 맛있게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 검증된 레시피는 널려 있으니 그대로 하면 대강 맛있게 나온다. 나의 특별한 기술은 거의 필요하지 않고 굳이 들어간 게 있다면 정성이다.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먹을 때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기분이다. 가족이 먹을 때 맛있게 먹는 모습이 예쁘고 보기가 좋아 행복해진다.      


  이번에 영화를 본 날 튀김 장면에서 못 참고 부추전을 해 먹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김치전을 했다. 처음 해 보는 메뉴인데 맛있었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안 해 본 요리가 많지만 뭐든 레시피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 음식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레시피나 식자재가 아니라 여유다. 시간의 여유. 마음의 여유. 다시 출퇴근하는 생활에 들어가면 요리를 못 한다. 나는 못 할 것 같다.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면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대접받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음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 자유롭고 노동시간이 적기에 여유가 있어서다. 밖에서도 일하고 집에서도 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쉴 시간이 없다. 집안일과 바깥일을 둘 다 열심히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엄마다. 엄마(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다. 아이들을 먹여야 하니 할 수 없어도 해내야 한다. 그걸 자녀 독립까지 2~30년 이상 지속한다. 우리 엄마도 전업주부였던 기간은 짧고 늘 밖에서 일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완전한 식탁이 차려졌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은 나에게 당연했다. 늘 있었으니까, 나의 땀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다. 일을 안 하고 돈도 안 내도 그저 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밥을 먹었다. 맛있는 밥상은 지극히 당연했기에 그걸 먹으면서 사랑을 느끼지는 않았다. 가끔 먹는 바깥 음식에 설렌 기억이 많다. 돌아보니 그 맛과 그 사랑, 그 헌신이 내 몸에 남은 것 같다. 엄마 말씀으로 ‘공주’처럼 자란 내가 이제야 요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내가 베푸는 입장인데도 사랑을 느낀다. 오늘 저녁을 이것저것 차리며 한 시간 반을 서 있었다. 아직 손이 느린 이유도 있지만 부엌에 가면 30분에서 1시간은 기본으로 든다.      


  글을 쓰러 방에 들어와 앉으니 피로가 몰려온다. 기분 좋은 피로다. 즉시 따라오는 성취감이 진통제다. 내가 저녁 준비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바깥일은 참 힘들다. 꼭 서비스직이 아니더라도 결국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다. 나를 돌보는 데도 힘이 드는데, 나를 무시하고 남을 위해 하루를 보낸 사람은 집에서까지 일하고 싶지 않게 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집에는 집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밖에서 힘쓴 식구들의 투정을 전부 들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며 씻고 나서 입을 속옷을 챙겨 주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피로가 절로 풀린다. 그런 역할을 하려면 바깥일이나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 환경에서 사랑을 나눌 만한 여유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주는 사람도 행복하고 받는 사람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가정의 책임자는 그럴 수 없어도 그렇게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 나는 ‘집사람’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떤 관계든, 나는 바깥사람에 더 알맞다고 여겼다. 지금은 둘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둘 다 한꺼번에 하기는 어렵지만 둘 중 하나를 책임감 있게 할 자신이 있다. 못 할 거라 생각한 일들을 하나씩 도전하면서 나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일정 수준까지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확인한다. 나의 숲에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부엌과 아늑한 식탁이 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난 지금 일시적으로 가능하다. 직장인이 된다면 일만 하기에도 버겁다. 그때는 나를 돌봐줄 엄마가 필요하다. 영화가 끝나면 삶이 시작된다. 지금은 시간과 감정, 체력을 많이 빼앗기지 않으니 마음이 여유롭다. 언제까지 허락될지 모를 이 시간 만큼은 영화처럼 보내고 싶다. 그 후에도 나의 작은 숲을 유지하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영화에 나오는 음식을 전부 시도할 때까지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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