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데려다줘서 고마워

by 아륜

예상했었다. 그때가 조금 빨리 왔을 뿐. 여든일곱이라는 숫자로 나를 규정하지 못해. 친구들을 숱하게 보내고 혼자가 된 후에도 나는 종종 아침 수영을 다니고 책을 읽었다. 내 또래 할머니들과는 달랐다. 나는 환갑의 딸보다도 젊고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래, 그때 내가 수술하고 며칠 지나 누워 있을 때 너가 문병을 왔지. 그 흔한 암이라지만 내 병은 주로 백인들이 걸린다던데. 희귀한 병은 나를 시들게 했다. 그때만 해도 날아다닐 때였어. 그날이 우리 마지막이었잖아. 벌써 작년이지?


큰아들 집에 있다가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요양병원으로 가게 됐어. 그곳은 이미 죽어있는 곳이었어. 병원에 살려고 간 게 아니라 죽으러 간 것 같았어. 너도 알잖니. 내가 나이는 많아도 뮤직뱅크로 아이돌도 보고 운동도 열심이란 거. 치매에 죽어가는 사람들 보는 심정이 어땠겠어. 점점 통증이 심해졌어. 그래도 빨리 가고 싶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어. 얼굴 본 지 좀 되었으니 내가 짧은 기간이지만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모를 거야. 정신은 멀쩡한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내가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느껴졌을 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으면서 동시에 죽고 싶었어. 하지만 모든 게 다 이치에 따라 될 거라 생각했지. 먹지 못하고 배출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어. 나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변의를 느껴 화장실에 가듯이 그렇게 점심시간에 눈을 감았다.

내 영정 앞에서 애들이 돈 얘기를 꺼낼 때 너는 상처를 받은 것 같더구나. 그럴 필요 없단다. 돈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필요하고 모든 일에 엮여있단다. 나도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지. 섭섭지 않게 챙겨줬는데도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니.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내 아들이다. 누가 뭐래도 맏아들이다. 큰아들과 큰손주가 가져야 함이 맞다. 착한 막내딸이 마음에 걸렸는데 네가 옆을 지켜주어서 고맙다. 엄마를 잃은 내 딸을 위로하고 껴안아 주어서. 네 엄마는 너 때문에 살아갈 거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화장당할 때 너는 많이 울더구나. 이런 데 처음이니? 놀랐겠구나. 나도 직접 하는 건 처음이야. 왜 그리 울었어. 내가 뜨거울까 봐 그랬니. 사실 나는 하나도 뜨겁지 않았단다. 시원섭섭했어. 평생을 가리고 있던, 나를 아프게 했던 이 피부, 이 피부를 걷어 내고 내가 열심히 단련했던 근육들도 미련 없이 떠나보내고 날씬한 뼈만 남는 홀가분한 과정이었단다. 내가 가벼워지는 시간 90분. 영화 한 편 본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구슬프게 울 필요 없었어. 네 엄마도 아니잖니. 그 마음 예쁘게 받을게. 살 만큼 산 노인이 다시 돌아가는 여정이란다. 옆방에는 새파랗게 젊은 아이들이 내 딸 만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으며 부스러지고 있단다. 부스러진다고 해야 맞을 거야, 그 젊은이들은. 함께 시작해 함께 타는 동안 나도 마음이 아팠어. 그리 눈물 흘리지 말아라. 웃음만 담아도 짧은 생이다. 예쁜 젊음 위에는 예쁜 미소만 올려라.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이야. 네 부모에게도 너에게도 일어날 일이야. 화장이 끝난 뒤에 내가 타고 갈 가마는 아주 작은 크기로 바뀌어 있었어. 올 때는 분명 무겁고 큰 관이었는데 말이지. 그 순간 내 육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절감했어. 모시고 가시면 됩니다. 안내말이 무색하게 나는 가벼워졌어. 너의 커진 눈에도 놀라움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렇게 케이크보다도 작은 박스에 선물이 되어 나는 비로소 집으로 가는 거란다. 오랜만에 남편을 만나기 위해. 내 엄마, 아버지, 형제들, 친구들, 그리고 남편이 걸었을 이 귀향길을 뒤늦게 따라 걷는 거란다. 앞서 남긴 발자국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 옆에 조그만 방을 내고 유골함의 모습으로 흙냄새를 맡았다. 네가 조심스레 얹어 준 흙도 따뜻하게 덮고 있단다. 고생했다. 바쁜 일을 제쳐 두고 극한의 피로를 견뎌낸 너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앞으로 나처럼 당차게 살아가면 된단다. 꾸준히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돈은 부족하지 않게 가지고 있고 가끔 아이돌 춤도 구경하면서 말야. 오늘 날이 좋네.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비가 오면 향긋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책을 읽으렴. 나는 반가운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러 이만 가야겠다. 아가, 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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