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조각일기

분노와 무력감의 양자역학

<버닝 각본집> 메모

by 아륜

나는 2010년에 영화 학교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나 서사(story telling)에 대해 배웠다. 그는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기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살면서 언젠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p. 191, 오정미 작가)



나는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남들이 보기에), 그것이나 스스로에게 영화를 만들 만한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시작할 수가 없어요. 그런 증세가 점점 심해져가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떤 영화가 확신이 드는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냥 내가 몸으로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가까워요. (p. 305, 이창동 감독)


세상은 점점 세련되어지고, 편리하고, 멋있어지지만 개인의 삶은 점점 왜소해지고, 보잘것없어집니다. 과거에는, 그러니까 내가 젊었을 시절에는 어떻게든 세상은 좋아지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은 그런 믿음도, 희망도 갖지 못하고 있어요.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고, 집값은 오르고,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커져가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불평등이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알바 하며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지요. 모바일을 통해 어떤 정보든 어떤 콘텐츠든 접근할 수 있고, 어떤 게임도 할 수 있어요. 게임 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죠. 그래서 현실의 불평등을 게임 속의 룰처럼 받아들이게 돼요. 불평등이 점점 세련되어 가는 거지요. 청년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들에게 세계는 거대한 미스터리 같아요. 마치 이 영화 속의 벤이 연쇄 살인범인지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친구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은 더욱 무력감을 느끼고 분노는 속에서 불타고 있지요. 사실은 이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지난 5년간 나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해온 오정미 작가였습니다. 오정미는 ‘아무 쓸모도 없는 헛간(영화에서는 비닐하우스)’을 불태운다는 구절을 읽을 때 분노를 느꼈다고 했어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헛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아무 쓸모도 없다고 판정하고 없앨 수 있다는 발상 그 자체가 무섭고 화가 난다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그 ‘쓸모없는 존재’에 감정 이입이 된 거죠. 청년들은 자신이 ‘쓸모없다’는 판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경쟁 사회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해요. (p. 307, 이창동 감독)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 있어서 두 작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어요. 포크너의 헛간이 삶의 고통을 안겨주는 분노의 대상이라면, 무라카미의 헛간은 괴이한 취미의 대상이죠. 어쩌면 실재하는 물체가 아니라 그저 가벼운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메타포인지도 모르죠. ‘버닝’은 무라카미의 단편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분노, 죄의식으로 가득찬 포크너의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즉 무라카미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젊은 포크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p. 309, 이창동 감독)


분노와 무력감, 그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유지하고 점점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p. 314, 이창동 감독)



해미의 춤도 사실은 안무하고 오래 연습한 것이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자유로움에 맡겨지도록 했죠. 모든 것이 (항상 그렇듯이)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지만, 의외의 것에 열려 있기를 바랐어요. (p. 316, 이창동 감독)



나는 관객이 ‘느끼도록’ 하는 데 주력합니다. 느끼면서 동시에 생각하도록 하고 싶다고 할까요? 느끼지 못하면 생각은 그저 관념에 불과하지요. (…) 종수가 새벽에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을 찾아 동네 주변을 달리는 장면에서는 그 공간의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전달하고 그 미적 쾌감을 통해 텐션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미학적 텐션’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게 뭐야?” 하며 어떤 감각이나 텐션도 못 느끼는 관객들도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니까 감독의 의도를 따지게 되지요. (…) 나는 관객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의 텐션과 감정을 느끼면서 매우 감각적인 영화적 경험을 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창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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