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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일기

가해자-피해자 구도에서 벗어나 매개 모드로

<모멸감, 끝낸다고 끝이 아닌 관계에 대하여> - 프랑크 M. 슈템러

by 아륜

모멸감을 다루기 어려운 이유는 이를 겪는 당사자의 개인적인 결점과 민감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문화에 형성된 모멸감의 구도를 알아야 한다. 단순한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지배적이다. p7


당신이 지금껏 경험한 모멸감에 대해, 그저 무력하게 전달받은 감정이 아니라 그 안에 당신의 책임도 있으며 스스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면 다소 불편할 것이다. p11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끌고 갈 견해의 출발점이 되는 두 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멸감은 일반적으로는 고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 전적으로 당사자 단독의 책임이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p23


타인에게 특정 기대나 요구를 설정해두고 후에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멸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입장 표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p47


나는 모욕당한 사람이 자신의 심리적 고통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데, 이는 당사자가 문화적 해석의 틀을 무심코 따르기 때문이다. p88

모멸의 당사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잠기고 또 그 생각 속에서 스스로 괴롭히며 시달리기를 반복한다. p51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 있으며 깊이 뿌리내린 가해자-피해자 구도에서 발을 빼고 싶다면, 가해자 역할에선 모든 잘못을 짊어지지(혹은 방어적으로 부인하지) 않아야 하며 피해자 역할에선 모멸의 근원이 본인에게 있음을(내지는 자가 공격적 질책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p205


만일 미하엘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기로 한다면, 맨 먼저 그는 자동주의를 중단해야 한다. 바로 이 순간 미하엘에게는 지금 느껴진 모멸에 어떻게 반응하고 싶은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는 수동적 도피와 능동적 공격을 넘어서는 세 번째 가능성을 필요로 한다. 이른바 중간 “매개 모드”에 있다.


충동에 순응하는 일과 우리의 실제 반응 사이의 간격은 넓어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심사숙고한 반응을 보일 커다란 기회를 가지게 된다.


심호흡을 하고 우호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고통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자기 응시를 통한 심사숙고는 물론 어렵다. 이는 어느 정도의 자기 절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동주의의 소용돌이가 지닌 흡입력과 피해자 역할이라는 달콤 씁쓸한 독선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게 하는 자제 말이다. 하지만 미하엘은 분명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리자를 공격하거나 그녀로부터 도피하는 시간, 자기 연민적 혹은 자학적 한탄과 되새김질의 시간 대신 자기 자비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모멸을 느낀다는 사실을 호의적이고 참여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 둘 사이의 긴장을 ‘견뎌야’ 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인 리자와 한동안 거리를 두고, 그의 입장에서 그리 내키지 않은 여러 감정들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서 온갖 불안과 두려움이 활성화될 수 있으나 자기 자비도 얻게 된다.


이 시간 동안 리자 또한 잠시 멈추며 자신과 미하엘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 기회를 얻게 된다.


공동의 멈춤은 적어도 공동의 활동을 뜻한다. 이는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지닌 비극에 맞서는 행동이다.


미하엘은 리자의 손을 잡거나 혹은 더 나아가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합의 하에 이루어진 부드럽고 조심스런 신체 접촉을 통해 둘은 서로의 결속과 일치를 즉각 느끼게 된다.


이는 갑작스런 모멸로 충격과 경악에 빠진 미하엘에게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하엘에게 불러일으킨 무언가로 놀라고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p. 208-218


“사랑을 기피하는 자만이 고통을 면할 수 있다.” 관계를 맺고 이에 깊이 발을 들이는 사람은 모멸을 경험하고 또 역으로 타인에게 모멸의 유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 좋은 관계는 모멸감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그들의 유대를 견고히 하고 강화하는 길을 찾아내는 관계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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