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시작해
지윤이 불러 여기까지 왔다. 맥주를 세 잔씩 마시고 한참이나 옛날이야기를 했다. 펍을 나오니 할 일이 없어서 피시방에 갔다. 내가 가자고 한 건 아니고 지윤이 이끌었다. 처음 오는 곳이라 회원가입을 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 회원 버튼 누르고 등록을 해. 또 올까 싶어 비회원으로 하려다 핀잔을 들었다. 일 년에 두 번쯤 하는 게임을 켜서 총을 쏘았다. 지윤은 오락실 장난감에 비해 명중률이 떨어졌다. 휴일에 늘어져 게임을 하니 대학 때 생각이 났다. 컵라면 하나와 콜라를 시키려는데 지윤이 막으며 말했다.
"잠깐. 라면은 먹지 마. 집에 문어 있어."
"무슨 말이야?"
"너 요리 잘하잖아. 어제 문어를 무턱대고 샀는데 맛있게 할 자신이 없어."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지만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먼저 직장이 생긴 지윤과 취업 준비에 바쁜 나는 이 년 정도 만나지 못했다. 안 봐도 그만인 사이였다. 가끔 사진으로 잘 살아 있구나 생각이나 하고. 싱가포르 놀러 갔네 예뻐졌네 구경이나 하고. 대학 친구란 그런 거니까. 대뜸 내일 놀자 전화가 왔고 나는 좋다고 했다. 지윤이라면 늘 친구였지만 졸업하고 처음이라 조금은 긴장되기도 했다. 셔츠를 빳빳하게 다리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향수도 뿌렸다.
지윤에게는 남자아이 같은 매력이 있었다. 시험기간 학교에서 같이 밤을 새워도 마음이 편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슬픈 영화를 보자고 한 사람도 지윤이었다. 모두에게 비밀이지만 내 방 샤워실도 한 번 쓰게 해 줬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안 될 건 또 뭔가 싶어서 따라왔다. 지윤은 202호에 살았다. 들어서자 타인의 냄새가 느껴졌다. 집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깨끗하다기보다는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화장대도 안 보이고 책상도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지윤이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 넌 안전해."
"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말을 뱉고 아차 싶었다. 지윤이 냉장고에서 문어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려 두었다.
"자, 시작해."
지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인용 소파에 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