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운대
덥다. 진짜 덥다.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에 폭염 경보가 내렸다. 지긋지긋한 계절 시험을 마치고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름은 더워서 여름이지만 오늘은 비인간적으로 뜨겁다. 사거리 파란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문자를 보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발갛게 익은 팔뚝을 감싸며 빠르게 걸었다. 해운대 같은 카페 외관을 보자 당장 뛰어들어 헤엄치고 싶었다. 주말에 공부한다고 데이트를 참았으니 꼭 열흘 만이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제목이 뭔지 모를 낡은 책이었다.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하는 그를 보자 장난을 치고 싶었다. 푹 숙인 고개 뒤로 다가가 몰래 껴안으려는 순간 믿음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ㅡ 잠깐, 정지.
나는 순순히 명령을 따라 모든 동작을 멈췄다.
ㅡ 내 옆에 앉는다, 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방치한 채로 그의 옆에 앉았다.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감쌌다.
ㅡ 나 너무 더워. 힘들었어.
힘들었지, 오느라 고생했어, 시험은 어땠어, 시원한 거 뭘로 마실래, 남자친구는 더위를 녹이는 말투로 나를 맞았다.
주문한 딸기 스무디가 불리자 그는 내 앞으로 유리잔을 가져다주었다. 분홍색 액체가 빨대를 통해 식도로 넘어가니 속이 동굴처럼 시원해졌다. 바깥의 살인적인 더위는 모두 죽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스무디 한 모금 먹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또다시 한 입 먹고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눈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 뜨거운 모든 것들을 다 싫어한다. 저 반짝이는 별 두 개만 빼고.
스무디를 반쯤 비우자 더위에 고장 난 정신이 돌아왔다.
ㅡ 뭐 할까, 우리 집 갈래? 에어컨 잘 나오는데.
냉방 시설 완비라는 꼬임에 넘어가 남자친구 집을 피서지로 정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아스팔트를 걸으며 땀을 한 움큼 쏟고 그의 집에 도착했다. 작고 깔끔한 집,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
ㅡ 솔직히 씻기는 씻어야겠다, 그치?
한여름 귀가 후 즉시 샤워는 당연한 순리였기 때문에 그의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남의 집에서 샤워를 한다는 사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 집에서 잠시나마 탈의를 한다는 사실,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런 걸 따질 날씨가 아니었다.
먼저 샤워를 마친 남자친구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주었다. 이런 남자 옷을 입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떨려. 나는 문을 꼭 잠그고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러 번 확인한 후에 정말 순한 바디워시로 땀이 가득한 몸을 씻었다.
수건을 두 개나 쓰는 게 미안했지만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했다. 수건 한 장을 바닥에 깔아 일회용 탈의실을 만들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자 웬 남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이런 비주얼이라면 안심해도 되겠어. 순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온다는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문해 보았다. 착하게 쉬었다 가면 암묵적 약속을 어기는 걸까. 그런 걸까.
ㅡ 뭐 마실래?
그는 카페 종업원처럼 자꾸 더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배도 고프지 않았고 샤워도 했고 조금 나른해졌다. 마지막 시험 때문에 두 시간밖에 못 자서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에게 잠깐 자도 되냐고 묻자 흔쾌히 자신의 침대를 내주었다. 타인의 침대에 들어가는 동작이 다소 어색했으나 쏟아지는 피로에 염치는 잊었다.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으며 침구에 묻어 있는 그의 향을 맡았다. 언젠가 품에 안겼을 때 나던 기분 좋은 냄새였다. 여기가 진원지였구나. 기분이 이상해지는 듯했지만 잠이 솔솔 왔다. 남자친구는 책을 뒤적거리다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코를 조용히 골자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준비되었고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