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

구토가 치밀었다

by 아륜

입사한 지 반 년이 되었다. 졸업하고 일 년이 지나서야 취업을 했다. 합격의 끝에 나는 지쳐 있었지만 이제 사람 노릇하겠다 싶었다. 우리 회사는 연봉이 높고 업무 강도도 높다. 평일에는 다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빨리 마무리해도 아홉 시가 넘는다. 집으로 돌아가 간신히 씻고 쓰러진다. 회사는 돈을 많이 주고 일을 많이 시킨다. 학생 때 천만 원 하면 대단한 돈이라 생각했는데 백 일 일하면 손에 차고 넘치는 금액이었다.


여유 있는 삶을 원했다. 피고용인으로서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동시에 가질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나는 돈을 택했다. 사람과 일에 치여 몸과 마음이 너덜거렸다. 대기업 사람들은 돈 쓸 시간이 없어서 가끔 통장을 보면 몇 천이 쌓여 있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돈을 버는 데 많은 시간이 들지만 쓰기는 순간이다. 나는 한 번에 큰 지출을 하며 나의 일상을 지켰다. 주말에 비싼 술을 마시고 구두를 샀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천만 원을 넘기자마자 집을 나왔다. 악을 쓰며 공부하고 죽어라 일만 하는 이유는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낳아주기만 하고 죽어버린 엄마, 죽지도 않고 오래도 살아있는 아빠, 어설프게 반반한 언니까지 다 지긋지긋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있어도 딸들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넉넉한 사람이었다. 능력도 없이 퍼 주고 빈손으로 돌아와 우리 딸 사랑해 지껄였다. 그 사랑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포장뿐인 마음이 아니라 돈을 포장한 마음이 필요했다.


우리 둘째가 집을 살리는구나. 합격을 알렸을 때 아빠가 역겹게 내뱉었다. 근사한 데 가서 사진 찍고 쇼핑하자는 언니에게 남은 돈을 쥐여주고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서 여행용 티슈를 샀다. 소리를 숨길 수 있는 곳을 찾다 노래방에 갔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휴지를 꺼냈다. 어두운 고독 속에서 억누른 억울을 꺼냈다.


지난 금요일에는 햄버거를 쑤셔 넣으며 일하다 열 시 반에 퇴근했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종일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연락이 오면 돈 달라는 말일까 긴장하게 되고 늘 예감은 실현된다. 자취방 현관문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아, 똑똑한 막내야, 아빠가 늘 미안해. 엄마 없이 씩씩하게 큰 우리 딸. 여기까지 읽고 찢어버릴까 했다. 항상 보던 문장, 팍팍한 내 삶을 피 말리는 서두.


일억이다. 이번에는 꼭 일이 잘 될 거라고 했다. 한 달 전에 천만 원을 뜯어갔다. 돈이 벌리기가 무섭게 빠져나갔다. 나는 아직 억을 벌어 본 적이 없었다. 이 년을 일해도 모자란 큰돈이었다. 그런 돈은 있어도 없다고 했을 거였다. 내 이름으로 대출을 해달라는 아빠의 자필을 보며 나는 일도 삶도 집어치우고 싶었다. 금융기관이 보기에 나는 믿음직스러운 조직에 속해 있었다. 미래를 저당 잡는 거대한 채무는 두려웠다.


어릴 때부터 집에 바라는 것 없었다. 그저 내버려 두었으면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시집을 가고 인생을 설계할 거였다. 아빠는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사람도 없다며 마지막이라 했다. 아빠와 언니가 적당히 벌어 알아서 살았으면 했다. 무능력한 포부는 누군가를 살해한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딸에게 꼭 이래야만 했을까. 이십 대 중반인 내가 오십 대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싶지 않다. 응원은커녕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삶을 살란다. 끝없이 깊은 빚 속으로 뛰어들라는 생부의 호각에 나는 이만 끝내고 싶었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나는 점심을 거르고 은행에 갔다. 돈 번 지 오래되지 않았고 금액이 커 금리가 높았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이자는 시간이 할부해 준다. 오래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밥 한 끼 밀어 넣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빠가 원하는 돈이 빠르게 꽂혔다. 여덟 개의 공을 나의 통장이 쥐었다. 그 공을 굴려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게워냈다. 오만 원권으로 뽑으니 말도 안 되게 부피가 작았다. 가방에 쏙 들어가는 노란 이천 장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 돈은 신생아보다 가벼웠다. 아기라면 중환자실에 가야 할 정도로 어렸다.


작은 돈다발들을 발치에 두고 약을 먹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 가져가라고. 구토가 치밀었다. 정신을 깨우는 아빠의 구토와는 다른, 잠재우는 구토를 거듭하며 나는 가족에게 암흑의 빛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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