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려 해도 깨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정관 7층에는 기억의 방이라는 열람실이 있다. 위층에 위치한 이성의 방보다 널찍한 분위기라 종종 찾는다. 기말고사 범위를 암기하다 지쳐 정원에 내려가 바람을 쐬고 왔다. 외우는 공부에는 의욕을 가지기 힘들었다. 머리에 무언가 담기는커녕 머문 지식마저 빠져나갈 판이었다. 숨도 안 쉬고 기계처럼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 틈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짐을 챙겨 나와 맞은편에 있는 상상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상의 방에서 공부한 적은 없었다.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왠지 엉뚱한 생각만 떠오를 것 같은 이름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글은 나를 주인공으로 실패자로 신으로 어린이로 만들어 주었다. 원하면 언제든 다른 사람이 되었다.
구석에 앉아 글을 읽고 쓰던 나에게 엄마는 과외를 붙여주었다. 엄마는 내가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는 면적도 넓고 전공도 다양하니 당연히 문예창작과도 있을 줄 알았다. 대학에서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어요. 엄마에게 말했다. 아침마다 꼭 먹어, 수험생에게 좋대. 엄마가 식탁에 영양제를 내려놓으며 아직 수험생도 아닌 나에게 답했다. 나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공부했다. 매일 밤 자율학습을 마치면 한 시간씩 몰래 글을 썼다.
나의 하루는 문제로 가득했지만 하얀 창을 통하면 다른 해설이 펼쳐졌다. 이야기 안에서 글을 쓰고 돈을 벌고 사랑을 했다. 현실의 삶에서 겪을 수 없는 갈등이 소설 속에서 생겨났다. 나는 또 다른 나와 대립하고 지어낸 타인과 즐겁게 충돌했다. 편한 마음으로 가상의 이해관계를 창조했고 이는 곧 세련된 거짓말이 되었다.
머릿속에는 항상 다채로운 그림이 떠올랐다. 낮에는 창의적인 생각을 억제해야만 했다. 나는 이성적 판단으로 스스로를 통제했고 마침내 엄마의 꿈을 이뤘다. 막상 대학에 와 보니 착실히 공부를 따라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뜻에 따라 우수 학생으로 자라고 있었다.
상상의 방의 공기는 달랐다. 조용한 분위기는 같았지만 보다 능동적인 기운을 느꼈다. 가방에 잔뜩 담아 온 전공 책은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노트북을 펴고 오랜만에 창을 열었다. 일기를 쓰기로 하고 일상을 돌아보았다. 나의 하루는 기억의 방에 처박혀 학점이 떨어지지 않도록 발버둥 치는 것이 전부였다. 순간 중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상의 방에서 7년 전의 나로 돌아가 일기를 써 보기로 했다.
오늘 성적표가 나왔다. 공부가 싫다.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는 건 재미있지만 무작정 외우라고 시키면 지루하다. 내 안의 창의성이 단조로움을 거부한다. 오늘은 밤새 다음 소설 구상을 할 것이다. 주인공은 중학교 1학년으로 소설가가 꿈인 학생이다. 저녁 먹고 바로 집필을 시작해야겠다.
몇 줄을 썼을 뿐인데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미 흐른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나는 활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지런한 글자들이 춤을 추는 상상을 했다.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일기 쓰는 모습을 그렸다. 고개를 숙이고 스프링 달린 노트에 글씨를 쓰는 내가 눈에 선했다. 더 이상 옆에 앉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밝았던 주위가 점차 어두워졌다. 커다란 방에 빼곡한 의자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자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신은 이미 소설가입니다.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였다. 등 뒤에는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는 내 방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에어컨이 없는 걸 보니 중학생 때 살던 집이었다.
똑똑, 밥 먹자. 엄마 목소리였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교복도 안 갈아입고 뭐 해. 젊어 보이는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상상력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식탁에 음식을 차리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나에게 수저를 놓으라 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내 머리를 툭 때렸다. 딱 소리와 함께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미역국에 흰밥을 말아 먹었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서 일기장을 찾았다. 방금 쓴 일기였다. 지금 나는 상상의 방에서 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일기장에 쓴 마지막 문장을 들여다봤다. 저녁 먹고 바로 집필을 시작해야겠다.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려 해도 깨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뿐이었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겨 펜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