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나쁜 곳
만약에 오늘 출근을 안 한다면?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겠지. 일어나자마자 재즈 밴드 음악을 들을래. 나의 심박동을 불규칙적으로 조절하는 피아노 리듬 사이를 찰랑찰랑 드럼이 채워. 눈앞으로 튀어나올 듯한 피아노 연주를 무시하면 베이스가 느껴진다. 벤이 그랬지,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껴 보라고. 멜로디를 그리는 피아노와 도회적으로 훅 들어오는 드럼에 취하면 베이스를 잃어. 중간에 피아노가 숨죽일 때 부쩍 자라는 베이스를 봐.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건조하게 목소리를 내는 대견한 존재라니까. 나는 어떤 악기를 닮았을까. 피아노? 드럼? 베이스?
오늘 날이 좋네. 아직까지 누워 있었어. 이제 진짜로 일어나야지. 아침으론 무얼 먹을까. 더블샷에 따끈한 크루아상, 샐러드는 어때. 다음 트랙으로 넘어 간 연주를 들으며 양치질을 한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틀어 올렸는데 이 상태로 나갈래. 살금살금 가벼운 세수 위에 에센스 톡톡 후 선블록을 바르자. 하얀 티 아래는 연청 진. 귀걸이는 축 늘어진 은색 달랑이를 하고 향수를 고른다. 오늘 청아하니 베이스를 잡아 줄 성숙한 향으로 선택. 발등이 전부 드러나는 신발을 신고 나간다.
가방은 따로 없다. 왼손에 핸드폰 오른손에 책 한 권. 크루아상이 맛있는 집 창가에 앉자. 아 햇살이 쏟아지네. 나는 오늘 시간이 많고. 이게 사는 거지. 창밖에 느릿느릿 산책하는 털북숭이 흰둥이.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홈웨어 차림의 엄마. 오픈을 준비하는 식당들. 내 앞에 놓인 까만 커피 한 모금. 온기를 간직한 크루아상을 맛볼까. 켜켜이 층층이 쌓은 겉이 바삭, 하고 부서져 손바닥에 떨어진다. 아아 향긋해라, 샐러드는 없어도 되겠어.
책을 좀 보자. 그래도 이 중에 제일 맛있는 건 활자. 씹는 맛이 좋아. 새하얀 세상에 새까만 글씨가 다인데 원더랜드로 떠날 수 있다니까. 에스프레소가 쓴지 모르겠어. 단 게 넘쳐나서. 백 페이지까지만 보고 일어나자. 책만 보긴 아깝잖아. 영화를 봐야지. 예매하지 않고 무작정 찾은 극장. 시간이 많고 좌석도 많다. 콤보를 시켜 품 안에 들고 자리에 앉는다. 띄엄띄엄 혼자 온 사람들. 이렇게 자리가 많은데 굳이 왼쪽에 붙어 앉은 저 사람은 뭐지. 불이 꺼지고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두 시간.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원히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 오늘 하루를 다 산 것 같아. 이제, 하지만, 밥을 먹어야지.
브랜드가 없는 동네 레스토랑에 첫 손님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가득 차기 전에 얼른 테이블을 비워주어야지. 오늘은 크림을 먹을래. 로제크림 파스타. 크림을 먹으면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끈적끈적 넘기면 배부르고 좋아. 콜라 같은 건 필요 없어. 하나도 느끼하지 않으니까.
음 이제 뭘 하지. 잠깐 코인노래방에 들리자. 몇 곡을 불러. 자유로운 이 시간. 흔들리는 음정 엇나가는 박자도 좋아. 간주도 좋아. 무거운 동전을 해치우고 나와 공원으로 간다.
풀빛 세상, 어젯밤 물기를 머금은 파란 세상. 난 이제 어지러워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마른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고 다리를 쭉 펴 본다. 살짝 누워볼까. 그러기엔 좁구나. 이 의자, 왜 이렇게 좁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산책을 하고 싶은데 포만감에 졸려 와. 이따 낮술을 마실까. 졸려서 누우면 좋겠다. 잠이 계속 와. 의자가 더 길어서 누울 수 있으면 좋겠어. 의자야 길어져라. 쭉 길게 늘어나라 기차처럼.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바다로 떠날까. 발 담그면 아직 시릴 수도 있겠다. 진짜 기차를 타 볼까.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월급 받은 지도 얼마 안 됐고.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 거지. 그래 오후에는 기차 여행을 가 보자. 기차를 타자. 기차역이 어디지.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지. 지하철 노선도를 펴 본다. 오늘은 지하에 박히기 싫은데. 버스 타고 싶은데. 아 버스를 탔구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왔지.
직장에, 버스를 타고 와서 바게트를 먹었지. 인스턴트 원두커피를 마셨고. 검은 티에 진청바지를 입었지. 음악은 잠깐 들었어. 하지만 누워서 듣지는 못했지. 스파게티를 못 먹어서 배가 고프네. 만약에 오늘 쉬었다면 나는 시 한 편을 썼을 거야. 내 시상을 찢어 버리는 직장은 나쁜 곳. 나빠. 나쁜 사람들. 망해라. 묶여 있기 싫어. 우울해. 밥 먹고 커피 마시러 가야겠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볼 거야. 분명 누군가도 오늘 하늘을 바라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