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책이 나를 구해 주지 않는다 해도 책을 사랑한다. 아끼고 곁에 두고 싶고 자꾸 끌린다. 안 보려고 마음을 먹어 보아도 결국엔 보게 된다.
냄새가 좋다. 향기롭지 않은 고유의 향기가 좋다. 생각이 지배하기 전에 나를 감싸는 마약 같은 책 내음을 맡으면 황홀하다. 촉감이 좋다. 지문을 간질이는 건조한 질감을 몇 시간 내내 규칙적으로 느낀다. 플라스틱은 향기도 없고 느낌도 없다. 전자책은 편리하지만 나를 매혹하지 못한다. 적당한 무게감이 좋다. 솜사탕 같은 원서도 금덩이 같은 양장본도 내 손에 살아 있다. 접은 채로 들어도 양손으로 펼쳐도 독서대에 묶어 놓아도 마구 쌓아 두어도 좋다.
독서의 성취는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확인한다. 삼백 쪽으로 압축한 새로운 세계가 손안에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텍스트를 얹는다.
나의 간택을 기다리는 책들은 서점과 도서관에서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대형서점에서 분야별 신간과 스테디셀러를 뒤적거리면 새 책 냄새가 진하게 동하며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면 마치 자물쇠를 맞추는 기분이다. 팔백팔 시옷 삼백칠십사 오케이 조금만 더 가면 돼. 또는 마지막 숫자를 모르는 전화번호 같다. 비슷한 숫자들을 지나 원하는 책에 연결되기 위해 나는 숨을 죽이고 책장에 가까이 다가간다. 은은하게 퍼지는 역사의 향이 나를 마비시킬 때쯤 주인공을 만난다.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눈에 띄는 책을 함께 데려온다. 낡은 표지와 누런 속지에서 시간을 달리해 책장을 넘긴 앞선 이들의 손때를 느낀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람을 읽는 시간을 빼앗는다. 어쩔 수가 없다. 제대로 읽지 못할 거라면 안 읽는 편이 낫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달콤하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 자신만의 시간에 살기 때문에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순간은 짧다. 나는 영혼을 울리지 않는 소음 속에서 고요히 머무르기보다는 차라리 떠들썩한 영혼에 갇혀 고통받고 싶다.
주인공 한탸가 압축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처절한 동시에 아름다웠다. 그는 가치를 지키고 변질을 거부하며 결말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책으로 자신을 파괴한다.
나의 비논리적 사고와 씁쓸한 비문은 이곳에 차곡차곡 내려 쌓였다. 아직 멀었다. 더 많이 읽고 써야 한다. 압축을 논할 단계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책을 끔찍이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