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긴장감을 털어내며
아침을 든든히 먹고 집을 나섰다. 편한 복장으로 찬바람 속을 걸어간다. 이곳은 일 년 만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현악 합주곡이 흘러나온다. 피부과 상담실에 온 것 같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생각보다 대기자가 많다. 간호사의 사무적인 푸념은 안 그래도 움츠러든 어깨를 더 작게 만든다. 커피는 금방 식고 컵을 비워도 차례는 오지 않는다. 여성의 사명감으로 묵묵히 기다린다. 긴장한 마음은 몸을 더욱 굳힌다.
들어오세요. 지정 선생님을 오랜만에 본다. 중학생처럼 어중간한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의대생이라 해도 될 만큼 앳되어 보인다. 그러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누구보다도 성숙하고 사려 깊어서 이 년째 女性을 맡기고 있다. 잠시 뒤면 일어날 푹신한 의자에 앉는다. 선생님과 마주 보는 시간은 귀하다. 이제 의사는 나의 눈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볼 것이기에. 동네 의원 환자 중증도는 정해져 있다. 종일 비슷한 업무를 반복할 그인데 따분해하지 않는 말투와 눈 맞춤으로 나의 주 호소를 경청한다.
기어코 그때가 왔다. 언제 세탁했는지 모를 치마를 받는다. 커튼을 치고 아래를 준비한다. 입고 온 바지와 속옷을 빠르게 벗고 산부인과 검진용 스커트를 착용한다. 양말은 벗지 않아도 된다. 검사받을 곳은 다리도 발도 아니다. 마음의 준비는 안 되었지만 의사의 시간은 돈이니 서두르기로 한다. 앉으면 자동으로 다리가 벌어지는 트랜스포머 체어에 올라탄다. 비장한 각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가능한 한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빼야 서로에게 좋다.
치과 방문 전에 양치질을 신경 써서 하듯 정성스러운 샤워를 하고 왔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혹시라도 유쾌하지 않은 입자가 그의 후각을 건드리지는 않을까. 친절한 가림막이 시야를 보호하고 나는 누워있기에 의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심호흡을 해 본다. 후우- 후-. 그에게는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 간단히 소독을 마친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페큘럼이 입을 다물고 들어온다. 입장을 완전히 마치면 기구는 의사의 눈으로 자궁경부가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려 고정된다. 잘하셨어요. 많이 불편하시죠. 한 번 더 불편할 건데 조금만 힘 빼시고 긴장 풀어주세요. 면봉으로 자궁경부의 세포를 묻히는데 미세한 움직임이 하나하나 생생히 느껴진다. 아프다고만 표현하기에는 숨 막히고 버거운 불쾌감이다.
이제 초음파 볼게요. 조금 불편하실 거예요. 단단하고 길지만 무미건조한 그것이 초음파용 콘돔을 끼고 들어온다. 나는 뻣뻣하게 얼어 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올 수 있는지 신기하다. 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기분. 꽉 차 있는데 빼앗긴 이 기분. 세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가득함이다. 배 조금만 눌러서 볼게요. 의사는 아랫배를 누르며 재빨리 초음파 사진을 남긴다. 행여 근육이 놀라 나도 모르게 수축하지 않도록 몸의 긴장을 푸는 데 집중한다. 능숙한 손놀림은 부드럽게 검사를 마친다. 그가 나와 같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된다.
이상한 치마를 벗어버리고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정상적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깨끗하네요. 다행이다. 나라가 생식기관을 걱정해주는 나이가 되어 억지로 왔지만 좋은 성적에 마음을 놓는다. 점심도 거르고 쉼 없이 진료를 보는 의사가 좀 더 간추려도 될 말들을 따듯하게 늘어놓는다. 알기 쉬운 용어로 나의 상태를 설명한다. 사랑이 결여된 침입이었지만 그보다 조심스럽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젊은 의사가 오래오래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급하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겠지만 재촉하지 않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것, 의사가 환자를 진심으로 대한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기술이 그에게 있었다.
밑이 뻐근했다. 끝나고 나면 별 것 아닌데.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잔뜩 떨었다가 끝나고 우스워 했다. 내년에도 똑같이 두려워하고 허무해할 것이다. 밥을 충분히 먹어서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면서 좋아하기 때문에 힘겹게 매운맛을 견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떡볶이 집에 들렀다. 알싸한 미각이 왠지 모를 공허감을 마취했다. 나는 긴 수술 끝에 회복실에서 막 깨어난 환자처럼 올해가 할당한 유난한 긴장을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