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에너지
화장하지 않은 지 이 년이 되어간다.
수능이 끝나고 화장을 시작했다. 바비브라운 젤 아이라이너와 맥 립스틱은 생필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블러셔를 바르고 대학생 놀이를 하다 바빠져서 곧 그만두었다. 색조를 한 적은 별로 없지만 비비크림은 꼭 발랐다. 비비 없는 외출은 없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비비를 발랐다. 찬 바람에 화장한 얼굴이 떴다. 화장으로 피부가 더 안 좋아 보였다. 그날로 비비를 끊었다. 다음 날 기초를 꼼꼼히 한 다음 선크림만 바르고 나갔다. 속옷을 안 입은 기분이었다. 공중화장실 거울을 보니 환자 같았다. 다음 날 비비를 바르는데 똑같이 이상해졌다. 화장을 지우고 시간에 쫓겨 에센스 하나에 선크림을 급히 바르고 나가 손거울을 보았다.
그렇게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적응이 되었다. 비비를 바르면 깔끔해지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처음에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남들은 알지 못했다. 나만 알았다.
술 약속이 있었다. 오랜만에 비비크림을 얹으니 화사해졌다. 쉐딩을 넣고 아이섀도를 바른 다음 아이라이너와 뷰러, 마스카라를 했다. 자꾸만 거울을 보고 싶어졌다. 훨씬 예뻐진 것 같았다.
결혼식 갈 일이 있었다. 화장품이 없어 종류별로 사와 유튜버를 따라 했다. 연한 파운데이션을 발랐는데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피부의 모든 숨구멍을 가려서 도대체 사람 얼굴 같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다 씻어버리고 맨얼굴로 식장에 갔다.
이벤트가 없는 한 나의 데일리 메이크업은 이렇다. 클렌징크림으로 얼굴을 씻고 수건을 쓰지 않는다. 에센스나 크림 같은 종류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바른다. 선크림을 바른다. 목에도 바른다. 립글로스는 선택이다. 살면서 피부가 나쁜 적은 없었다. 비비만 바르고 다녔다. 화장품을 제한하면서부터 피부가 더 좋아졌다.
화장이 익숙하면 짧은 시간에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장을 할 때 들이는 열심이 나에게 생기지 않는다. 예뻐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집중하는 행위에는 의욕이 필요하다. 나는 읽고 쓰는 행위에 거의 모든 주의 집중력을 사용하고 있어 그 밖의 일은 자연스럽게 소홀해졌다.
거울을 본다. 맨얼굴에는 낯빛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날의 얼굴색이 있다. 글의 세상에서 호흡하며 나는 행복해졌다. 환한 생기가 얼굴에 비친다. 생김새가 아닌 얼굴빛을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 내 얼굴은 자기 전과 똑같다. 누구나 잠들기 전의 내 모습을 관람하는 것이다.
화장을 안 하고 옷도 대강 입게 되었다. 늘 입는 옷들을 입고 또 입는다. 계절마다 옷이 한정되어 있다. 신발도 그렇다. 뭘 사거나 덧입히지 않게 되면서 필요한 물건이 없어졌다. 물건은 복잡하다. 내 속에 많은 콘텐츠가 있다. 그것들을 생각하기에 바쁘다. 물건을 피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에 욕망이 사라졌다. 욕망은 내가 하고 싶은 일, 얼굴이 아닌 종이에 그리는 일로 방향을 틀었다.
노 메이크업은 단순히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를 잊는 것이다.
여성들의 얼굴을 본다. 예뻐서 눈이 간다. 예쁜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럴 때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얼굴을 꾸며 좋은 기분을 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화장하면 섹시해진다. 화장은 더 깔끔하고 여성스러워져서 최종적으로 섹시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섹시하다. 눈빛이 섹시하고 목소리도 섹시하고 말하는 내용도 섹시하다. 화장을 하게 되면 나의 섹시함이 표준화된다. 나는 억울해진다. 하루 만에 쓱쓱 그릴 수 없는 섹시함을 나는 원한다. 더 섹시해지고 싶고 그렇게 보이고 싶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루 만에 섹시함을 입었다가 다시 벗고 싶지는 않다.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섹시함을 입고 싶다.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내 생각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을 긍정하는 기운으로 나는 특별해져서 화장을 했냐 안 했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나는 그런 힘을 내뿜는다. 둘은 비슷할 수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나는 내면의 에너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운이 나의 메이크업이다.
이 글은 보통의 노 메이크업 후기가 아니다. 나만의 노 메이크업 후기다. 나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글이다. 나만의 메이크업 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