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인호는 강남역 10번 출구로 나와 걷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은 끝없는 가능성으로 들떠 있었다. 건물 위에 크게 그려진 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자 정시 레이저쇼가 펼쳐졌다. 화려한 조명의 강남대로는 하나의 큰 무대 같았다. 이 무대에서는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1이 될 뻔한 그는 오늘 준수와의 저녁 약속으로 비중 있는 조연이 되어 무대에 올랐다. 준수는 인호의 가장 친한 친구다. 둘의 우정은 어느덧 십 년을 바라보고 있다. 둘은 할 일 없는 주말에 함께 소주잔을 부딪는 절친한 사이다. 준수에게는 여자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준수에게 두 달 동안이나 여자친구가 없던 적은 처음이라 인호는 지난주 술자리에서 준수의 외로움과 여자를 향한 갈망에 대해 한참이나 주정을 들어주어야 했다. 바로 그다음 날 준수는 같은 술집에 다른 친구와 갔다가 옆 테이블에 있던 여자를 만났다. 그날 둘은 바로 사귀기로 했다.
두 시간 전 인호는 여자친구 지원과 다퉜다. 별것 아닌 일에 화가 치밀었고 언성을 높이며 무섭게 지원을 몰아붙였다. 인호는 오늘 자기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잊어버렸다. 인호가 꺼낸 감정은 화가 아니라 단순한 짜증일지도 몰랐다. 그는 요즘 지원에게 전보다 관심이 떨어졌다. 지원의 부모님이 유럽 여행을 떠났고 지원은 인호의 자취방에 같이 살다시피 드나들었다. 처음 일주일은 좋았다. 사귄 지 이 년이 다 되어가는 커플은 신혼부부가 된 것처럼 저녁을 해 먹고 사랑을 나누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이 주쯤 지나자 인호는 이 생활이 따분해졌다. 함께 있는 건 좋았지만 게임을 할 때도 영상을 볼 때도 지원이 엄마처럼 감시하고 있어 눈치가 보였다. 우리 집에 살림 차리라고 한 사람은 인호였다. 항상 아쉬워하며 헤어졌기 때문에 오래 붙어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인호에게는 더 이상 지원의 분홍 토끼 수면바지가 귀여워 보이지 않았고 가냘픈 목선보다는 매일 똑같은 똥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친구의 사랑스러움은 욕실 곳곳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 낼 때마다 쉽게 사라졌다. 지원은 부부 놀이가 마냥 재밌는 듯했다. 전혀 자극이 되지 않는 비주얼로 지원은 신호를 보내다 제풀에 지쳐 토라졌다.
인호는 귀찮아졌다. 재미있는 게 필요했다. 지원을 집에 두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생각나는 곳은 피시방뿐이었다. 새로 바뀐 알바생은 시급을 더 받아야 할 정도로 예뻤다. 타이트한 줄무늬 티셔츠에 겨울 핫팬츠, 검은색 비치는 스타킹까지 겸비한 그녀는 인호에게 벌써 세 번째 게토레이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주문할지 컵라면을 고르던 인호에게 전화가 왔다. 준수가 새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여태까지 사귄 여자 중에 제일 예쁘다는 준수의 말이 끌렸다. 인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원은 인사도 없이 문을 쿵 닫고 나간 인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공허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지 고민하다 소설책을 꺼냈다. 지원이 책을 꺼내 몇 줄을 읽는데 눈물이 나려 했다. 지원은 인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 따라 자신이 벗고 돌아다녀도 관심도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이해하려 했다. 좋지 않은 생각이 이어지자 지원은 시야가 흐릿해져 글을 읽을 수 없었다. 지원은 책을 덮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인호의 집에는 전자피아노가 있었다. 지원은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해보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음악이 슬펐고 건반이 젖어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지원은 다음으로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인호와 준수와 준수의 여자친구는 호프집에서 만났다. 예나는 추운 겨울에 대출한 봄 같았다. 어두컴컴하고 추운 세상에서 혼자만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처럼 보였다. 인호는 예나에게 한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준수는 예나가 앉아있는 의자를 팔로 감쌌다. 예나는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슬프고 목말라 보였다. 그녀는 진한 화장에 목소리 크고 말 많던 준수의 옛 여자친구들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인호는 마치 소개팅에 나온 듯 예나와도 대화를 주고받았다. 준수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인호는 예나에게 오늘 밤 일정에 대해 물었다. 예나는 준수의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고 답했다. 인호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갔다. 막 나오려던 준수는 들어오는 인호를 보며 오늘 예나와 잘 거라고 말했다. 인호는 준수에게 너무 빠르지 않냐 핀잔을 주었다.
지원은 먼저 어제부터 쌓여 있던 설거지를 해치운 후에 빨래를 급속으로 돌리기로 했다. 건조대에 걸린 마른빨래를 차곡차곡 접었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인호의 옷과 책을 정리했다. 바닥도 깨끗하게 두 번씩 닦았다. 인호가 금방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지원은 혼자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요리를 하기 싫었다. 지원은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매운 음식이 당겨 떡볶이를 가장 매운맛으로 주문해 두었다. 자신의 캐리어도 정리했다. 빠르게 돌린 빨래가 다 되어 지원은 옷을 널었다. 자신의 집은 아니지만 깨끗해진 모습에 지원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집안일을 마치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가 떡볶이가 배달되어 왔다. 지원은 콧물까지 흘리며 매운 떡볶이를 먹었다. 속이 화끈거렸다. 지원은 인호가 미웠지만 그들 사이에 공백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화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듯했다. 지원은 먹다 남은 음식을 깨끗이 정리하고 간단히 짐을 챙겨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인호가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오자 예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준수에게 안겨 있었다. 준수는 예나가 피곤해해서 그만 가 봐야겠다고 했다. 셋은 하나와 둘로 갈라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인호는 집으로 가면서 예나 생각을 했다. 예나는 오늘 준수랑 자겠지, 준수를 거쳐 간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겠지,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질투심과 거부감에 힘이 들었다. 인호는 집 앞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지원과 같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오늘만큼은 지원을 보기가 싫었다. 오늘 처음 본 예나가 인호의 머릿속에 반짝거렸다. 집은 깨끗했고 집안일이 다 되어 있었다. 인호는 샤워를 하면서도 자신의 집안을 깨끗이 정리해 준 지원에게 고맙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오늘 지원을 지워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인호는 물기를 대충 닦고 맨몸으로 침대에 들어갔다. 지원과 여러 차례 사랑을 했던 그곳에서 인호는 예나 생각으로 몸을 떨었다.
지원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 커피를 내려 마셨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살이 찐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예쁘게 봐 주면 예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원은 인호가 사랑이 식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를 믿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인호의 화가 풀리고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마음이 누그러져 인호에게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인호와 함께 살다시피 지낸 짧은 기간이 지원에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자연스레 그려지는 둘의 미래가 얼마나 기대되는지, 더 좋은 여자가 될 거라는 다짐까지 지원은 함께 적어 편지 봉투에 넣고 하트 스티커를 붙였다. 편지를 쓰면서 좋은 감정을 가득 채운 지원은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인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호는 지원의 전화를 받기 싫었다. 지원을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지원이 늦게 들어왔으면 했다.
세 통의 전화를 건 지원은 인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없이 짐을 챙겨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게 후회되었다. 바깥바람이 차서 지원은 다시 밖에 나가기가 싫었지만 인호를 보고 싶어 지갑만 들고 택시를 잡았다.
인호는 만족감과 불쾌감이 공존하는 이 상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지원은 인호의 집으로 돌아와 비밀번호를 누르고 바로 들어갔다.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인호는 다 벗은 채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찌그러진 맥주 캔 세 개와 과자 껍질이 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