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밥 차려줄게
아침을 거르고 서둘러 나간 딸아이의 방을 정리하다가 책상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엄마. 어제 엄마를 봤어요. 저 무서워요. 이 감정이 무서워요. 엄마는 나에게 늘 엄마였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요. 그런데 어제 본 엄마의 모습은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엄마가 여자구나, 처음 깨달았어요. 아빠랑 헤어지는 거예요? 그 아저씨 누구예요? 자상하고 다정해 보이는 그 남자. 엄마 애인이에요? 엄마를 본 순간 엄마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나만의 엄마가 내가 모르는 세계에 있었어요.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내가 닿을 수 없는 세상에 가 있었어요. 엄마가 처음으로 멀게 느껴져요. 엄마, 내 엄마. 형편없는 성적표를 내밀어도 등을 쓸어주던 엄마. 아빠에게 혼나 울고 있으면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던 엄마. 내 피 묻은 속옷을 빨아 주던 엄마. 피아노 콩쿨에서 입상하지 못했을 때도 대상 같은 꽃다발을 안겨 주던 엄마.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아기 엉덩이에 하얀 분을 칠해 주던 엄마. 날 낳기 위해 자연적으로 인공적으로 이중고를 겪은 내 엄마는 어디 있어요? 나만을 위해 존재하던 그 엄마는 어디 갔어요? 엄마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요. 엄마가 멀게 느껴져요. 그런데 그런 엄마가 밉지가 않아요. 안쓰러워요. 아빠 사랑을 받지 못한 엄마가 불쌍해요. 엄마는 이렇게 젊고 예쁜데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고요한 평화를 깨트린 엄마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엄마와의 거리가 파괴된 지금 나는 오히려 엄마가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져요. 차가운 아빠 앞에서 늘 미소짓던 엄마를 보면서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어제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내가 그동안 소리 없는 폭력의 방관자였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가깝게 느껴져요. 이제 엄마가 사람 같아요. 지금 엄마가 멀고도 가깝게 느껴져요. 무서워요. 엄마를 미워하고 싶어요. 엄마를 미워하면서 나를 두고 어떻게 그랬냐고 따지고 싶어요. 하지만 예쁜 우리 엄마,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우리 엄마가 마침내 사랑받는 모습이 예뻐 보였어요. 엄마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엄마를 이해하고 말았어요. 가깝게 느껴지는 엄마가 무서워요. 나는 엄마가 엄마일 때가 좋아요. 용돈을 주고 방을 어질렀다고 핀잔을 주는 그런 엄마가 좋아요.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이 편지를 보고 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딸의 편지를 보고 한참을 서서 울다가 답장을 기다리는 듯이 놓여 있는 새 편지지에 답장을 썼다.
딸아. 네가 벌써 열일곱이구나. 엄마가 미안해. 얼마나 힘들었니. 놀랐지. 엄마도 많이 놀랐어. 어린 너에게 큰 상처를 줬구나. 내 딸, 오늘은 멀게 느껴진다. 이런 순간을 상상해 본 적도 있는데 막상 닥치니 엄마도 당황스러워. 엄마가 예뻐 보였다는 너의 그 말이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엄마가 밉지 않니. 왜 엄마를 미워하지 못해. 엄마는 그 말이 참 아프다. 다른 아이들은 집을 나가고 엄마를 증오하지 않을까. 너는 왜 이해해 주니. 네가 커버렸다는 게 낯설다. 우리 애기가 너무 컸구나. 엄마도 무섭다. 엄마는 너의 엄마야. 잠시 여자가 되어 행복을 느낀 거 맞아. 엄마 행복했어.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이미 네가 엄마를 품었구나… 엄마도, 나도 무서워. 오늘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떤 표정으로 맞이해야 할지. 저녁은 무슨 요리를 해 주어야 거르지 않을지. 엄마는 무섭다. 딸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할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두렵다. 우리 딸 오늘 집에 올 거지?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게. 일단 너를 보자마자 꼭 안고 싶다. 너무 커버린 너를, 갑자기 멀게 느껴지는 너를 꼭 안고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싶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오면 엄마는 너를 안고 펑펑 울고 싶구나. 그리고 너에게 따뜻한 저녁을 해 주고 마주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의 거리를 다시 좁히고 또 적당히 넓히면서 엄마와 딸로서 다시 만나고 싶구나. 엄마는 너에게 엄마야. 영원히 엄마야. 엄마는 변하지 않아. 네가 오면 다 얘기해 줄게. 집에 들어올 때 평소처럼, “엄마 나 왔어. 나 배고파.”라고 말해줄래. 엄마가 밥 차려줄게. 딸아.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