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

미지의 열기

by 아륜

하얀 바탕에 파란 줄이 그어진 환자복은 P의 몸에 비해 작았다.

“점심 먹고 두 시쯤 세탁실에서 환자복이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밤 근무자가 물품 청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 환자는 드물어서 환자복을 사이즈 별로 한 벌씩만 보관했는데 다 나간 상태에서 P가 입원했다. 평소 입는다는 크기보다 하나 작은 옷 한 벌만 남아 있었다. 여벌옷이 있는지 아침에 막내가 확인했을 텐데 놓친 듯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과에서 빌려다 드릴게요. 잠깐 앉아계시겠어요?”

“입으면 들어가겠는데요. 간호사님 바쁘신데 나중에 오면 바꿔 주세요.”


P의 주 호소는 Fever다. 진단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원인 불명의 발열이다. 감기약을 복용하고 병가 내서 쉬기도 했는데 며칠째 열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에 왔다. 삼십칠 도 후반 열이 계속되면서 오한 증상과 근육통을 겪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급히 나간 혈액검사와 요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P의 일인실 문을 두드렸다.


“P님, 담당 간호사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방으로 들어가 사생활 보호를 위해 문을 닫았다. 환자는 작은 환자복을 입고 옆으로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침상에 비치된 알콜젤로 손소독을 했다. 혈압계 커프를 오른팔 위쪽에 감고 청진기로 P의 위팔 맥박을 들었다. 혈압은 정상이었다. 일어나려는 환자를 눕히고 다시 손소독 후 알콜스왑으로 고막체온계 센서를 닦았다. P의 귓바퀴를 뒤쪽 위로 잡아당겨 바깥귀길을 곧게 펴 주고 귓구멍에 체온계를 꽂았다. 삐-. 섭씨 삼심팔 도 일이다. P의 왼쪽 손목을 가져와 엄지에서 뻗어 나온 동맥을 찾았다. 오른쪽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 끝으로 맥박수를 셌다. 일 분에 백십팔 회. 평소의 두 배였다. 삼십 초 동안 맥박을 재서 두 배를 하고 나머지 삼십 초는 맥박을 재는 척하며 몰래 호흡수를 측정했다. 가만히 누운 허파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세어 보니 분당 삼십 회나 되었다.

투명한 생리식염수가 P의 왼팔 정맥을 통해 빠르게 주입되고 있었다.

“팔 벌려 보세요. 추우실 거예요. 아이스백을 대어야 열이 내려가요. 균 배양검사 결과 나오고 약을 쓸 거예요. 양쪽 겨드랑이에 차가운 아이스백을 대고 있을 건데요. 조금 추워요. 지금도 추우실 텐데. 이렇게 해야 열이 내려가고, 열이 내려가야 P님이 덜 힘들어요.”

쓰린 마음으로 팔 아래 아이스백을 대어 주었다. 남성 환자는 여성 간호사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환자인데도 말이다. 아까만 해도 씩씩하게 대답했던 P가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너무 추워요.”

목까지 올린 이불을 내려 덮어주고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물었다. 그간 어떤 병을 앓았는지 가족 질환이 있는지 술이나 담배는 어느 정도 하는지 큰 수술 한 적 있는지 먹는 약은 어떤 건지. 힘들겠지만 꼭 거쳐야 하는 절차이기에 중요한 사항 위주로 빠르게 대화를 마쳤다.


“보호자는 어디 가셨어요? 여자친구 분이시죠?”

“아니요. 친군데 근처에 있어서 같이 와 줬고 지금은 자기 남자친구 만나러 갔어요.”

따로 사는 부모를 부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어딘가 급성 감염일 텐데 보호자 없이 끙끙 앓을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저, 바로 나가셔야 하나요?”

“그럼요. 다른 환자분들도 아프신데요. 한 시간 뒤에 열 체크할게요. 조금 떨어질 거예요.”

“네…”

“추우셔도 아이스백 꼭 대고 계셔야 돼요. 그래야 안 아파요. 주사 부위는 괜찮으시죠?”

“잘 들어가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더 가는 환자가 있다. P가 그랬다. 아픈 와중에도 바쁜 상황을 이해해 주고 묵묵히 지시에 따르는 사람. 나이대가 비슷한 환자를 만나는 일은 가끔 있었다. 그때마다 신체 접촉은 최소화하고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으려 했다.

“식사는 상관없으니까 밥 나오면 드세요.”


열로 달아오른 P의 뺨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병실을 나섰다.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줄줄이 서 있다. 아니, 누워 있다. P와는 한 시간 뒤에 다시 보기로 약속했다. 오십 분쯤 뒤에 가서 열이 떨어졌는지 수액이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녹은 아이스백을 새것으로 바꾸어 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환자복이 와도 수액 줄 때문에 혼자 갈아입기 힘들다. 상의를 갈아입을 때 P를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걱정을 떨치려 애쓰며 P의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앞으로 갔다.


한 시간이 지났다. P의 기본 검사는 예상대로 염증 수치가 높았다. 그사이 예정에 없던 환자가 응급수술 후 주렁주렁 이것저것 달고 병동에 올라왔다. 불안에 떠는 보호자 열 명을 물리치고 환자의 남편만 병실에 남도록 했다. 수술을 마친 환자는 삼십칠 도 중후반의 열이 난다. 전신마취 후 배를 헤집었으니 그럴 만하다. 물 한 모금도 금지된 환자를 위해 식도 대신 정맥에 달콤한 음료수를 부어주는 게 중요하다. 입에는 물을 조금 적신 멸균 거즈만 허락한다. 가장 마지막에 마취가 풀리는 방광에서 소변백으로 맑은 소변을 뱉어내는지 양을 체크하다 P 생각이 났다. 손목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에서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수술 환자는 자신이 견딘 수술에 비해 혈압과 체온이 안정적이라 마음이 놓였다. 흐르는 물에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P의 방으로 갔다.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환자복이 허물을 벗고 있었다. 누가 구해다 주었는지 새 옷차림이었다.

“할 만하던데요.”

P가 상장을 내미는 아이처럼 말했다.

“잘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죽을 것 같아요.”

손소독 후 체온을 쟀다. 38도 1부. 열이 그대로다. 반대쪽을 재니 38.2℃였다. 맥박은 분당 백 회로 나아졌지만 여전히 급했다. 무기력하게 늘어진 아이스백을 거두어 복도로 나가자 컴퓨터 앞에 전공의가 서 있었다.

“선생님, 정 교수님 fever 환자 P님 지금 8도 2부에 펄스 백이고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사 줍시다.”

전산 처방이 입력되자마자 처방전을 뽑아 간호조무사에게 약국에 다녀오도록 했다. 응급수술 집도의가 회진을 다녀간 사이 P를 잠시나마 천국에 보내 줄 묘약이 도착했다. 손을 닦고 앰풀 입구를 소독한 후 꼭지를 톡 땄다. 주사기는 사선으로 기울여 한 방울도 남김없이 2cc를 빨아들였다. 약을 들고 P에게 갔다.


“엎드리세요. 엉덩이 주사 맞을게요.”

바로 돌아누운 P가 양팔에 얼굴을 묻었다.

“해열진통소염제인데요. 땀이 쫙 나면서 열이 내려가고 좋아지실 거예요.”

P가 고개를 숙인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거 아픈가요?”

“하나도 안 아파요.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

P의 환자복 하의를 오른쪽에서 조금만 내려 말아 두고 손을 소독했다. 알콜스왑으로 주사할 부위를 둥글게 닦은 후 주사기 뚜껑을 열었다. 왼손 중지와 약지 사이에 새 알콜스왑을 낀 채로 주사 부위 옆을 살살 두드리며 오른손으로 빠르게 주사를 꽂았다. 약물을 끝까지 밀어 넣고 재빨리 빈 주사기를 제거하자마자 알콜스왑으로 주사부위를 문질렀다.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제 엉덩이를 세게 문지르며 P가 말했다.

“이제 그만 문지르셔도 돼요. 근육 주사는 정맥 주사보다 느리지만 먹는 약보다 효과가 빨라요. 열이 떨어지는 느낌이 드실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된 듯 P가 말했다. 수액이 주입되는 속도를 확인한 뒤 병실을 나와 주사침을 정리하고 손을 씻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난 한 시간 동안 만난 환자의 이름을 클릭해 기록을 남겼다. 짧은 문장들이지만 글쓰기 시간이었다. 나와 그들이 함께 만든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서술했다. 그동안 P의 체온은 마약처럼 황홀한 하강을 경험하겠지만 서너 시간 후면 본래의 열기를 회복할 것이다. 반감기에 무지한 채 약에 취한 P는 이불 속에서 단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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