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황혼 일기

<짧은 소설> 2009.08.28.

by 백경


이젠 너무 늙어버린 내 몸에선 하얀 비늘 같은 것이 자꾸 떨어진다. 표피에서 박차고 나간 그것들은 내 몸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며, 어쩌면 진저리를 치며 떨어져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자고 일어난 잠자리 주변은 늘 부유스름한 그것들이 어지럽혀 그녀의 새된 소리가 온 방을 뒤덮는다. 젊을 땐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며 촉촉하고 매끄럽던 피부 덕에 나 좋다는 여인들 여럿이었는데,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늙으며 변한 것이 어디 피부뿐이겠는가. 푼더분하던 얼굴의 양 볼엔 우물 자리가 깊고, 살아온 세월을 가늠하는 주름은 안쓰럽게 여러 갈래로 자꾸만 번지며 굵게 팬다. 염색을 해도 금세 또 어디선가 백발이 숭숭하고, 그나마 머리칼이 덜 빠진 것에 스스로 위안을 한다.


그녀 말처럼 저승 갈 채비하라고 생겨난다는 저승꽃은 온몸 여기저기 모양새도 없이 피어난다. 더욱이 왼쪽 뺨에 보기 흉할 정도로 길고 크게 자리잡아 핀 그것은 우리나라 지도와 꼭 닮았다며 자주 그녀가 종애곯린다.


"당신도 많이 늙었네! 검버섯이 얼룩덜룩이야!" 딴에는 그녀의 늙어감에 한 켠 마음이 안 좋아 한 말인 것을 그걸 꼬투리 삼아 허구한 날 내 얼굴에 지도가 걸렸다고 놀려 먹기 일쑤다. 한두 번은 그냥 듣고 말았는데 들을수록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늙으면 애와 다를 바 없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그만한 일로 어린아이처럼 파르르해지니, 외려 그녀는 날 골려 먹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리에도 팔에도 매가리가 없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비쓸해서 그녀의 부축을 받을 때도 있다. 여리기만 했던 그녀가 이젠 나보다 힘이 더 장사다. 무거운 화분도 번쩍 들어다 옮기고 장롱도 여기에서 저기로, 지난번 내가 마당에서 쓰러졌을 때 업어다 뉘인 이도 그녀 아니던가. 성질을 내도 너는 무연히 짖어라, 늘 그런 식이 된다. 침묵이 때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해보지만 그녀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 이제 내 침묵도 쓸모가 없어졌나 보다. 나의 침묵을 가장 두려워하던 그녀였다.




나를 버린, 내 몸의 일부였던 그놈의 비늘 같은 각질 탓에 오늘 아침도 집안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겨우 가라앉았다. 그녀가 집을 들었다 놨다 할 땐 그저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녀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고 있는지 점점 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내 눈과 마주하지도 않은 채 왜장질이 잦다. 혼자 있을 때도 그리 큰 소리로 말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괜스레 혼자 빈정상해서 대거리해대다간 하루가 길어진다. 그저 묵묵히 아무 말 않고 듣고 있노라면 화기 잔뜩 올라있던 기세도 다소 숙지근해진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더니, 그녀는 어느 날엔 세 시에 깨서 운동을 한답시고 처진 배를 출렁이며 나부댄다. 또 어느 날엔 네 시에 깨서 백팔배를 올리며 불경을 외는데 그 소리가 가히 듣기 민망스러울 때가 잦다. 소리는 내지 말고 절만 하면 안 되겠냐고 하면, 기운 세고 이제는 사납기까지 한 그녀는 괴괴하게 더 큰 소리를 던진다.


국으로 가만있으라는 말씀이다. 그냥 눈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그녀의 헉헉대는 소리가 암만해도 신경에 거슬려 다시 불룩해지려는 아랫도리를 이불로 덮는다. 그녀가 알면 주책이네 노망이네 어쩌네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테지만, 아직 내 몸 어딘가에 인체의 신비가 미치고 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는다.


간동한 살림에 뭐 그리 치울 것이 많다고 매일 아침상을 물린 후엔 내게 비를 들이민다. 젊었을 적엔 모두 그녀가 알아서 하더니 어느 때부턴가 시집갈 딸년에게 살림을 가르치듯 하나씩 내게 짐을 지운다.


외출은 왜 그리도 잦은지, 툭하면 동네 여인네들과 어울려 시설스럽게 떠들고 다닌다. 노인정에서 단체로 가는 관광은 내가 가지 않는다 해도 절대 빠지는 법 없이 참석하고, 심지어 오가는 버스 안에서 숭하다, 욕하던 그 춤을 정작 그녀가 춘다. 젊었을 적 그녀를 떠올리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소 집 앞 노인정엔 여인네들만 득시글한데, 그날은 어찌 사내들만 여남은 명 모여 앉았다. 늡늡한 김 씨가 우스갯말 한번 하겠다고 하는 말이 "우리가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돼! 자리 비운 사이에 우리 버려두고 마나님들이 이사 가버릴 수도 있어. 설사 집에 있어도 버리고 갈 수 있대. 그걸 예방하는 차원으로다 다들 강아지 한 마리들 사라고. 중요한 건 이삿날 반드시 그 강아지를 확보해야 해! 고놈을 꼭 안고 있으면 절대 버리고는 못 간대." 다들 호탕하게 웃어넘기긴 했으나 어째 뒤가 꿀리는 것인지 표정들이 영 씁쓸하였다. 나는 집에 있는 복실이를 떠올리며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걸긴 했지만 가슴속은 왠지 알알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는데 어이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한 것인지. '다음부턴 열쇠는 꼭 챙겨 다녀야지!' 다짐을 하는 차 다행히 그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무릎이 그녀의 처녀 적 빵빵하던 가슴만큼이나 쑥 나온 바지를 걸치고, 내가 입다 버리라고 내놓은 목 늘어진 내복 바람으로,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금세 하품이라도 할 듯한 입 모양을 해대며, 아주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그녀가 나왔다. 목 늘어진 내복 사이로 그녀의 쭈글거리는 가슴도 축 늘어져 있다. 노인정에서 축 처진 내 신세 탓으로 알알하던 가슴속이 그녀로 인해 더 자긋자긋해졌다.


내 젊은 날, 알게 모르게 여러 여자를 만나며 그녀 속 꽤나 끓였다. 스물에 처음 만난 그녀를 서른에 다시 만나 함께 살며, 그때는 왜 그렇게도 내게서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기를 염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도, 거듭 태어나는 아이들도 내게는 그저 짐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여기저기로 부유하지 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몸과 마음은 밖으로만 돌고, 그런 나를 잡아두려 애면글면하는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버리고 떠났었다. 시간이 흘러 능력은 달리고 몸은 쇠잔해지니, 다디단 말로 유혹하던 숱한 여인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사흘돌이로 술 푸던 친구 놈들도 대면하기 힘겨워지더라.


지금은 젊은 그때와는 반대로 모든 것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려 하나, 정작 나는 한낱 비늘 같은 각질이 떨어져 나가는 것조차 못내 서운하고 휘휘하기까지 하니 인생무상을 실로 실감하는 나날이 이어진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모든 것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내 몸에 붙어 있는 것들도 하나씩 둘씩 나를 떠나 종내엔 온전히 자연의 하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무엇이 급해 아등바등 일찍 떼어내려 그리도 애를 태웠던가. 어린 여자에게 눈이 뒤집혀 집 나간 아비를 몹시도 찾던 아이들도 지금은 모두들 각자의 자리로 떠나갔다. 정작 내 손을 잡고 싶을 때 뿌리쳤던 비정한 아비를 그나마 명절이나 생일 때 잊지 않고 찾는 것은 아직 내 곁을 버티고 있는 기운 세고 드센 그녀 덕분 아니던가.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 입에 달고 사는 그녀의 말이 한 치도 틀림이 없음을 그날에서야 알았다. 다소곳하고 곰살스럽던 그녀가 드센 여인네가 될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 찬란해야 할 그녀의 젊은 날을 내 방황과 방탕으로 짓이기고, 늙고 기력 다해 다시 그녀에게 기어드는 나를 받아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가 따랐을까. "불쌍해서 당신 들이는 거야! 인간적으로 불쌍해서! 늙고 힘없는 그것 자체가 불쌍해서!" 오래 밖으로 돌다 집을 찾았을 때 그녀가 뱉은 말이다.




노인정에서 점심을 먹고 다리 건너 약국에 들러 몸에 바를 연고와 보습제를 샀다. 오는 길에는 속옷 가게에 들러 땡땡이 잠옷 한 벌과 가슴 주변에 레이스가 달린 내복도 하나 샀다. 내 몸의 비늘이 덜 떨어지면 아침마다 그녀의 새된 소리도 잦아들 테고, 그녀가 목 늘어난 내 내복을 입지 않으면 더 오래 나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작은 소망 하나 가슴에 품는다. 모든 것이 내게서 조금만 더 천천히 떨어져 나가기를.


내가 사 온 땡땡이 잠옷을 입고 그녀가 큰 대자로 코 골며 곯아떨어졌다. 그녀의 코 고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 우렁차다.


- 자국눈 내리는 겨울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