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신입사원의 숫자, 13
지고 온 삶을 내려놓고 흔들리는 끝으로 간다.
날개를 접으면 불안의 꼭대기에도 앉을 만하다.
어떤 것의 끝에 이르는 것은 결국 혼자다.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어느 회사원의 ‘13’> - 태호
나의 일상 소개. 평균 근로시간을 훌쩍 넘기며 일하는 유통 회사의 신입사원. 아침 7시 출근, 밤 11시에 퇴근한다. 13시간가량의 노동이다. 주5일제이지만 조금씩 늘어난 업무량에 요즘은 주말에 쉬는 것마저 여의치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적 자원으로 기존의 업무를 하려 한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라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시간 중에는 좀처럼 시간이 없기에 사내에서 자기계발이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제대로 된 기획서를 쓰려면 자료 수집을 위해 끼니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사전 자료를 읽어야 한다. 기획서 준비라는 명목이 있어도 업무 시간에 사무실에서 책을 보는 행위? 아직 이 공간에선 허락되지 않는다.
홍보실은 회사의 ‘외교관’ 격이다. 회사를 소개하고 대외 활동을 지원하고 알린다. 실제 외교관과 차이가 있다면 입보단 ‘기획서’로 말한다는 것이다. 철저한 수치와 계획에 근거한 기획서로 임원들에게 최대의 예산을 지원받고 이것으로 대중을 홀리는 홍보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이 홍보실 업무의 ‘처음과 끝’이다. 그러므로 기획서는 예산 계획을 위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홍보 실행 전략에 있어서는 이상적이어야 한다.
얼마나 헤맸던가. 이상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신입사원이던 나의 기획서엔 ‘신개념’, ‘초대형’, ‘블록버스터’, ‘획기적인’, ‘궁극의’와 같은 단어로 가득했다. 이런 말은 기획 예산안 통과 후 광고 카피에서나 쓰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이었다. 좋은 기획서는 담백하다. 미사어구는 적지만 디테일하다. 누락된 기획서는 책임지지도 못하는 형용사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선택된 기획서는 현실적이고 세밀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설명한다. 도입부에는 핵심과 전략을 제시하며 호기심을 끈 후 중반부에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현실 가능성, 후반부엔 인력, 일정, 자금 전략을 보여주어 기획서를 읽는 사람이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획서의 기승전결 전법’ 그걸 제대로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다.
그렇게 1년간 ‘저녁 없는 삶’을 일상화하며 식사 시간과 잠을 줄이며 작성했지만 결제 라인에도 못 들어간 자식 같은 기획서가 어느덧 13장. 한 달에 한 장 정도는 헛발질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13장의 풋풋한 기획서가 좋다. 나의 서툰 첫사랑 같아서인지 몰라도 애정이 간다. 그 서툰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숙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이곳을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떠날 수 없다. 내 열정이 투영된 기획서를 실행시켜줄 수 있는 곳이 이곳이기에, 함께 열정을 쏟을 사람이 있기에 13시간이고 13장이고 더 높은 숫자라도 되는 데까지 견뎌보련다. 그게 나다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