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숫자#7] 어느 취준생의 숫자

당신의 숫자는 무엇인가요?

by 김권

숫자는 추상적이다. 사람은 미간 사이의 주름 약간으로도 화가 난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있는데 숫자는 아무리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옆 사람이 아프면 신경 쓰이고 내 가슴도 뛰는데 뉴스에서 사고로 304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엔 ‘쯧쯧, 가여워라.’ 하며 혀를 차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숫자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새해 떡국 먹을 땐 괜히 싱숭생숭하고, 월급날 통장 잔액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가도 카드 결제일이 휩쓸고 간 통장 숫자를 보면 ‘휴~’ 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그득한 숫자들.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의미를 균형 있게 살피는 것이 이 기획의 출발이다.



<취업 준비생의 숫자, ‘750’> - 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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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현재 나의 상황을 고려할 때, 몹쓸 생각이었다. ‘리스닝 파트(Listening Part) 3’ 가정법 문항이 진행 중인 토익 고사장에서 딴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미 첫 문장을 놓친 후였다. 당연히 답도 보이지 않았다. 앞에 2번 정답이 많았기에 정답은 3번으로 결정. 빨리 찍고 다음 문제를 기다렸다. 또 한 번 잡생각에 말릴 순 없다. 얼마나 기다리던 12월 토익 대박 달이던가. 결연히 의지를 다지며 문제를 섭렵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만으론 이루어지지 않는 야속한 세상은 나를 다시 놀렸다. 데자뷰 같은 시간의 반복이라니. 시험 종료 10분을 남긴 나의 상황은 이전 시험 양상과 놀랄 정도로 비슷했다. ‘리딩(Reading)’ 지문 네 개 열 문제가 남은 상황. 10분 동안 두 지문을 불확실하게 풀고 남은 문제는 3번으로 찍었다. 이전의 195개의 문제 정답은 2번이 다수일 거라 믿으면서.


나는 토익 오수생(다섯 번째 응시 준비 중)이다. 부끄럽지 않다. 나는 토익을 깔보며 살아왔다. 언어로서의 영어, 회화영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토익시험 점수 없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해외여행을 돌았고 전국일주를 했다. 책상머리보단 경험을 믿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세상과 현실 속 세상의 괴리는 꽤 컸다. 구직 시장에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진입조차 못하게 밀쳐낸 건 ‘지원 자격 토익 800점 이상’이라는 획일화된 잣대였다. ‘그들이 정 그걸 원한다면 까짓것 해주지 뭐.’ 하는 마음으로 뒤늦게 이곳으로 왔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거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맞추는 삶을 거부해서 뒤늦게 이곳으로 온 거니까.

신발 사이즈보다 조금 높은 첫 토익 점수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며 700점의 고지를 선점했다. 방학 기간 연애도 끊고 토익 단기 속성 반에 매일 세 시간씩 고스란히 투자한 결과였다. 학원에선 영어로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보단 문제를 어떻게 빨리 푸는지를 알려주었지만 뭐 점수가 오르니 좋았다. 스터디원 중 이상형도 없었으므로 하늘이 돕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금욕적으로 달려온 지 어느덧 5개월, 마의 750점대를 넘지 못해 한 달째 답보 상태.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길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때론 힘들지만 나는 오늘도 토익 ‘파트 7’ 문제를 푼다. 시험장에서 상념 없이 두 시간 동안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MC스퀘어(집중력 높이는 전자기)를 듣고 독해 시간을 줄이기 위해 문제를 먼저 읽는 법과 영어 문장을 청크 단위로 읽는 훈련을 한다. 그렇게 나의 청춘을 잠시 불태운다. ‘그래, 750이란 숫자로 규정될 순 없는 노릇이다. 두고보자.’


그림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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