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숫자 #2] 이별의 숫자들 part 2

숫자와 당신의 이야기

by 김권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든 것들이 있다. 지나간 버스, 상영종료된 영화, 흘러간 시간, 떠난 연인. ‘운명이지, 뭐’하고 포기하는게 아니라, ‘왜 그랬을까’ 자문해 보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윤정의 숫자, 1004

: 10월 04일, 그녀가 겪은 일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망막에 비친 그 모습에 오류가 있기를, 아니면 그냥 꿈이길 믿어도 봤다. 현실 부정을 30초간 하니 이내 다른 느낌이 덮쳐왔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그 느낌을 견뎠다. 그리고 그날을 ‘패배의 날’이라 불렀다.

10월 04일, 천사데이의 참사. ‘천사’는 그날 자체가 아니라 그 장면을 목격하고 전해준 대학 친구였다.

그날의 패배자는 오직 한 명, 스스로를 연애 고수라 칭하고 남자는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자부해온 나 자신뿐이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일찍이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는 ‘연애’라는 영역에 내 청춘의 에너지를 한껏 쏟으며 살아왔다. 몇 달 전 ‘칼퇴’가 가능한 적당한 직장을 구했고, 시의적절하게 하얀 미소년 스타일의 183 남자 친구도 구했다.

그를 만난 지 어언 1년, 이 친구와 하는 결혼은 미친 짓만은 아닐 거야, 하며 한집에서 같이 살림하는 상상을 할 즈음 사건이 터졌다.

나른한 가을날의 오후, 남자 친구를 늦잠꾸러기라 놀리며 카톡창을 닫은 지 5초가 채 되지 않아 알림음이 울렸다. “카카톡카톡~” 큰일을 보려고 화장실을 가려던 참이라 2초간 망설이다 스마트폰 액정을 검지로 슥 그었다.

대학 동기 수연의 메시지. “남친이랑 있어?” 그걸 열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변기에 앉으며 문자 키를 터치했다.

“형석이 집에서 잔대. 왜?”

“아니 나 지금 경마장인데, 니 남친이랑 똑같은 뒤통수가 내 바로 앞자리에 있어. 어떤 여자랑 손잡고. 뭔가 냄새가 나.”

“야, 그 짱구 되게 흔해. 투 블록 컷으로 자른 그 머리도 그렇고!”

“그래서? 확인해, 말아?”

카톡방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후회막심한 그 말을 결국 해버렸다.

“사진 찍어 보내봐.”

몇 분 뒤, ‘형사 코스프레’가 신난다는 어투로 친구는 말했다.

“무음 카메라로 옆통수 찍었어. 내가 볼 때, 백 프로야.”

사진으로 얼굴을 확신할 순 없었다. 심증도 없었다 하지만 물증이 있었다. 내가 사준 퍼플 컬러의 머플러. 그 남자가 그걸 목에 두르고 있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리라!

패딩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집 근처인 여의도역에서 경마공원까지 가는 30분 동안 ‘사람이 생각을 이렇게 빨리할 수 있구나’를 실감했다. 생각은 거센 강물처럼 흘렀다. 잡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함께 부산 여행을 다녀온 지 2주도 안 되었는데’, ‘어젯밤의 눈빛엔 거짓이 없었어’, ‘결혼을 생각한 난 뭐지?’ 등.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정말이지 굴욕 그 자체였다. ‘눈 딱 감고 모른 척해?’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느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사실이었다. 출근길 ‘지옥철’에선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30분, 지하철 열 정거장 거리가 마치 10분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역은 경마공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방송음의 끝자락을 겨우 붙잡아 전동차에서 내렸다. 역에서 경마장까지 그 먼 거리를 숨이 넘어갈 듯 달렸다.


친구를 만나 일반석 구석쪽에 있는 그를 봤다. 아직도 웬 여자와 손을 잡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그 머플러, 그의 귀, 좁은 어깨선, 짧은 구레나룻과 가는 턱 선도 봤다.

밀려드는 확신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을 그때 그가 경마장 전광판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만 ‘확신’해버렸다. 눈과 코와 입까지 전부 그였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 ‘이건 꿈일 거야. 고약한 꿈!’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킥’을 사용해 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 수연이 차가운 현실을 바로 자각하게 만들었다.

“어쩔 거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했다. 물로 눈물을 희석시켰다. 그것을 반복하니 눈물과 물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냥 미세한 흐느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마음을 다독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범한 통화 연결음이 계속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울었다. 베개가 젖었다.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러곤 마지막 카톡을 했다. “우리 헤어지자. 그동안 즐거웠어. 잘 지내.”

쿨하게 말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음악이 바뀌는 3~4분에 한 번씩 카톡 대화창을 확인했다. 글 왼쪽의 ‘1’이란 숫자가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얽혀들었다.

밀려드는 생각을 이길 자신이 없어 스마트폰을 침대에 던지고 라면을 끓였다. 건조한 표정으로 덜 익은 면발을 흡입하고 돌아와 침대 위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카톡 왼편의 ‘1’은 사라져 있었다. 해명도, 변명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감은 눈꺼풀 사이로 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천사데이(1004)인 2013년 10월 4일은 마치 마취 없이 사랑니를 뽑은 날처럼 떠올리기 싫은 불안한 기억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다행이야, 그날 일기를 쓰지 않아서.’



그림 봄소라(빅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