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당신의 이야기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든 것들이 있다. 지나간 버스, 상영종료된 영화, 흘러간 시간, 떠난 연인. ‘운명이지, 뭐’하고 포기하는게 아니라, ‘왜 그랬을까’ 자문해 보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 ‘5분’이 쌓여서 결국 이별, 그리고 찾아온 변화
어제와 같았다. 5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벤치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란 남자… 참 한결같다.” 약속 장소에 항상 5분씩 늦는 건 그냥 그날의 운이 따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지 않아서 출근길 현관문 앞에만 서면 배가 부대껴 화장실에 들른 것이고, 운이 좋지 않아서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생각난 거다. 그래, 운 때문이다. 운이 안 따라줘서 매번 데이트에 늦었고 결국 그녀와 헤어진 거다.
결정적 순간에 불운이 발생하는 현상, 이런 것이 바로 ‘머피의 법칙’인가?
영화 [인터스텔라]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 이름이 왜 하필 머피냐?”는 딸의 물음에 대한 쿠퍼(매슈 매코너헤이 분)의 대답과 표정이 생생하게.
"머피의 법칙은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만한 일은 그게 뭐든 일어난다는 뜻이야."
불운이라는 것은 없고, 세상은 필연적 인과관계의 연쇄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 5개월 전 영화를 볼 당시엔 한껏 공감한 말인데 지금은 온몸을 흔들며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재형)와 은정의 이별도 일어날 만한 일이었단 말인가?
우주가 우리의 이별을 조장했다는 건가? 쿠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필연이 아니라 그저 불운한 것에 불과해.’
그래도 한번 천천히 지난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나는 어떤 태도로 그녀를 만났나? 왜 그렇게 대충 살았을까? 왜 그리도 안이하게 판단했을까? 왜 항상 약속 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을까?
발이 닳도록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늘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을까? 왜 그녀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게 했을까?
그녀는 카페에서 홀로 기다리는 시간에 ‘왜 나는 연애를 하고 있는데도 외로울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어찌 보면 이 일의 책임 소재는 머피의 법칙과 불운에서 찾을 게 아니었다.
우리의 이별은 오직 ‘재형이라는 육체를 입은 한 인간의 총체적 무능’, 말하자면 5분씩 매번 늦는 내 게으른 습관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물일지도. 무능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진 않지만 실제로 무지했던 것 같다.
스스로 왜 늦는지 고심해본 적이 없었다. 미국 경제지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실린, 항상 5분 늦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미리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기사에 따르면 항상 5분 늦는 사람은,
1. 늘 ‘베스트 시나리오’만 생각한다.
2. 자기가 먼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는 걸 못 견딘다.
3. 효율을 따진다며 집에서 나오기 전에 꼭 뭔가 하나를 더 한다.
그랬다. 나는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총 5일 중 이틀은 20분, 사흘은 30분이라는 것을 진작 정확히 측정해놓았어야 했다. 늘 지하철 앱에서 계산해주는 시간만 믿고, 변수에 대한 계산없이 집을 나섰다니.
내 이런 게으름이 ‘코리안 타임(5분 지각 문화)’이 실재한다는 낭설에 일조하고 있었는지도….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걸 ‘시간을 버리는 짓’으로 간주했다. 남는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그녀를 잔잔히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습관이란게 무섭지….
나는 집에서 우리 아지트가 있던 홍대까지 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외출하기 직전에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보거나 설거지통에 물을 받은 다음 집을 나서곤 했다.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고, 늘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성과를 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런 내 안일함이 그녀를 기다리게 했고 ‘그와 계속 만나면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으며, 그 의심이 쌓여 결국 이별을 낳은 것이다.
이대로 포기해야 할까? 우리의 헤어짐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 고민은 현재 무의미할 것 같다. 혹시나 필연적으로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우주적 섭리가 있다고 한들 그걸 미리 걱정하고 주저 앉을순 없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꿔가야지. 윤동주처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끈질기게 사랑해야지.
결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당장 내가 건 전화 한 통이 그녀와 내 관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르잖아!
[인터스텔라]에서도 결국 ‘사랑’이 운명을 이기지 않나? 지구를 지키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브랜든 박사(앤 해서웨이 분)의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이해는 못 하지만 믿어보기는 하자고요."
그림 봄소라(빅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