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의 숫자#3] 그의 러브레터 13통

동건의 짝사랑에 대하여

by 김권

짝사랑에 대한 숫자 이야기 :


왜 우리는 사랑을 맺는다거나 사랑을 이룬다고 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다’고 할까. 사랑의 깊이 때문일까. 사랑이란 ‘심연’이 우주처럼 깊어 들어가면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일까. 세 사람을 만났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이번엔 그들의 숫자에 얽힌 ‘사랑’이야기다.



<동건의 짝사랑 : 13통의 러브레터>


저기 한 사람이 있다. 눈빛이 우울하고 어깨는 축 처져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 마음에 하고 싶은 말 한가득 안고 있지만 상처받는 게 두려워 말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사람. 캠퍼스 커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떠들지만 할 수 있는 건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보내는 것밖에 없던 22살의 청년. 서툴고 어설펐던 그 시절 나의 이야기다.

“선배는 좋은 오빠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에요.” 13번째 편지에 넣은 마지막 문장, “널 좋아하는 것 같아”에 대한 그녀의 답이었다. ‘좋은 오빠...’ 그랬다. 그녀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아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집을 나섰다. ‘외로움’이란 단어로 절반도 표현 안 될 그 감정. 존재의 허무, 슬픔, 욕망, 고통이 엉킨 감정이 밀물처럼 닥치던 그 밤을 홀로 견딜 수 없던 터였다. 버스를 잡아타고 심호흡을 한다. 넘실거리는 마음을 잡으려는 작은 발버둥. 하지만 어림없다는 듯 마음은 더 요동친다. “왜 난 안 되는데!” 오이도 선착장 끝자락의 바다를 향해 외쳤다. 대답이 없다. 돌을 하나 집어 힘껏 던졌다. 퐁 하고 떨어진 돌멩이가 바닷속으로 잠긴다. 그렇게 얼마간 슬픔에 잠겨 울었다.

그녀는 예뻤다. ‘미소천사’라는 말로 형용하기 가장 적절한 사람이 그녀였다. 우윳빛 피부와 가치런한 치아를 환히 드러내며 웃을 땐 영락없는 천사였다. 군 제대 후 짧은 머리가 부끄러워 강의실 뒤편에 앉은 내게 어느 날 그녀가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신입생 이소연입니다.” 그때 결심했다. 그녀와 캠퍼스 커플(CC)이라는 것을 해보겠다고. 큰 부담 없이 다가가기엔 편지가 제격일 것 같았다. 중대 내무반에서 편지 송신횟수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내가 아니던가.


첫 번째 편지에선 느닷없는 편지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지나치게 빠른 디지털 시대가 싫다느니, 집에 편지지가 많이 남는다느니 하는 치졸한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답장은 없었다. 그러던 언젠가 연애 경험이 많은 한 선배에게 ‘네 마음만 디테일하게 써라’는 조언을 들은 다섯 번째 편지부터 조금씩 내 마음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점점 표현이 발전하고 있었다. “너랑 같은 수업을 듣게 되어 기뻐”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면 참 비슷할 것 같은 생각을 했어” 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묵묵부답 그녀였지만 눈빛을 보면 나를 비호감 경계대상1호로 선정한 것 같진 않았다. 편지는 은밀한 루트로 전해졌지만 이따금 ‘영국문학사’ 같은 수업에서 교수님이 늦을 때면 세 마디 정도의 대화를 편하게 나눴다는 사실이 나의 판단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시나리오도 완벽해보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찌질 하지만 결국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더구나 나는 그런 찌질 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추파를 함부로 남발하지도 않았으니 계속 ‘순수한 이미지’로 밀고 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변화된 편지가 비약적 도약을 이루는 시점은 12번째 편지와 13번째 편지 사이였다. 그 두 편지에 클라이맥스인 “너 같은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기분이 참 좋을 것 같아”와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의 온도차는 지금 생각해도 참 크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해묵은 속설을 연애의 모토로 삼았던 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찍고 있는 도끼날이 ‘이가 다 빠진 구리도끼’라는 것도 모른 채 그냥 계속 무턱대고 찍기만 했다는 것을 깨닫는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3년. 그렇게 격정을 인내한 나의 짝사랑은 단숨에 지고 말았다. 그녀와 좋은 오빠로 계속 지내는 것은 3년 동안 바친 내 ‘순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포기했다. 이후 5번의 연애를 했고 지금은 솔로 2년차다.


이제 나도 사랑을 계산할 줄 안다. 일정 정도의 에너지를 쓰면 넘어갈 묘목과 수백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을 통나무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마음 쓰는 만큼 상대에게 받길 원하고 그런 규칙이 이루어지지 않는 만남은 시작조차 않는다. ‘사랑이 원래 이런 걸까?’ ‘계산하며 하는 게 진짜 사랑인가?’ 회의가 밀려올 때면 13통의 편지를 쓰며 마음 졸였던 그때를 회상한다. 계산 없던 감정, 모든 사랑이 가능하다 믿었던 순정, 진심은 결국엔 통한다는 믿음. 그것을 가지고 마음 가는대로 사랑했던 나를 그리워한다. 파블로 네루다 말처럼,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그림 봄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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