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없음의 완전함
집 대청소를 깔끔히 한 뒷날 참지 못하고 백합 한 다발을 손에 꼭 쥐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서 아직 꽃도 피지 않은 봉우리로 골라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봉우리가 꽃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그러다 다행스럽게 예쁜 꽃으로 완성이 되자, 이젠 그것이 져버릴까 봐 노심초사였다. 줄기 끝도 매일 잘라주고, 영양제도 물에 부어주면서 조금이라도 내 곁에 있어달라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시간은 내게서 꽃을 앗아갔다. 나는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 늘릴 수 있었을 뿐 (아니 내가 무엇을 하든 나와 그 정도 시간만을 함께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내게서 시들어간다는 결정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다 시들어 버린 백합을 눈 돌리지 않고 마주하면서 시들어 가는 과정을 함께해주는 것 밖에는 그것의 유한한 생명을 애도할 길이 없었다. 그것의 떠나감이 못내 아쉬워, 시들어 간 꽃을 다른 꽃으로 바꿔주어도 이 애잔하고 멍청한 과정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꽃을 데려온 다는 것은 내게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되었다. 꽃집을 지나쳐 오가면서 그 싱그러움에 감탄하곤 하지만 항상 선뜻 들어가기가 힘든 건 그것이 결국은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어딘가 쓸쓸하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는 자신의 현명하지 못함과 그것의 사라짐을 멈추지 못한다는 능력의 유한함을 또다시 느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내게 꽃다발을 건넨다면 나는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으로 그 손을 맞이한다. 그들이 전하는 꽃에는 나의 이 순간을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온전히 기뻐해 주고, 함께해주겠다는 약속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순간이 시들어 간다고 해도 지금은 완전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하고 기뻐하겠다는 무의식적인 의미가 전해져 온다. 꽃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서, 나에게도 사라져 버릴 많은 것들이 나의 존재로 함께하고 있어서. 시들어 버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이면 충분하다는 메시지는 고스란히 내게로 와서 닿는다.
아름답기 때문에 탄생부터가 슬픈 존재. 그것이 사라져야만 세상이 이어져 갈 수 있는 것들. 우리는 가장 필요 없는 것을 소비함으로써 가장 완전한 메시지를 전한다. 어떠한 필요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소중하다는 진심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