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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이 Oct 06. 2024

오늘 일어난 일




이건 재미있는 글이 아니다.



아침 열시에 눈을 떴다. 눈 뜨자마자 명상 어플을 켜서 수면 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목소리는 눈을 뜨지 말고 천천히 기지개를 하라고 했다. 목소리는 나에게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상상하라고 했다. 나는 눈을 다시 떴고 오늘을 살았고 내가 본 것들을 나열해본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쓰레기봉투 20L 버튼을 찾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는 약간 짜증이 났고



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를 보며 할 일이 참 없구나 눈길을 애써 피했고



버스를 타자 맨 뒷 좌석에 노인과 젊은 남성이 각각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노인의 옆에 앉았고



내 앞에 탄 여자는 머리를 감고 덜 말린채여서 검은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고



식물 분갈이를 하려고 들어간 가게 주인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나를 알아봤고(어 그때 선인장)



만화책방에 가기 위해 탄 버스의 운전기사는 너무 환하게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내가 내릴 때도 크게 인사했다.



여의도 한강 공원으로 가는 4인 가족은 나의 좌석 앞 뒤로 앉았는데 앞에 앉은 엄마에게 딸은 자신의 신발이 예쁜지 엄마 신발이 예쁜지에 대해 물었고 엄마는 자신의 신발이 더 예쁘다고 말했고 딸은 뾰루퉁 해졌지만 금세 웃었고



내 뒤에 앉은 아빠와 아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들의 옆 좌석에는 커플이 타 있었는데 커플 중 여자가 남자 아이에게 음료수를 건네줬다. 나는 그게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고맙다고 말했고 아들은 신이 나서 재잘댔는데 아빠는 받아주질 않았고 잔다고 말했고 아들은 말했다. ”그럼 내가 도착하면 깨워줄게“



버스에서 내려서 만화방에 책을 반납하러 갔는데 평소에 친하던 아주머니가 아니라 아저씨가 있어서 아쉬워졌고



아이스크림 와플을 파는 옆가게에 갔는데 아이스크림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그 와플 가게엔 이구아나가 있었다. 와플 가게에 이구아나라니.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걸었다. 걷는데 할머니집 냄새가 나서 오른편을 바라봤다. 차가운 반찬을 파는 가게였다.



걸었고 또 걸었고 그렇게 걸었나?



안산천을 지나 걷는데 강가 주변에서 쭈구려 앉아 새들이 몸을 씻는 장면을 바라보는 할머니 두명과 아이들을 봤다. 그리고 또 걸었다.



김창완의 노래였습니다….라고 말하는 라디오 소리가 들렸고 이내 작아졌고



횡단보도를 건너 체육복을 입고 있는 아줌마를 봤는데 멋져보였다. 나도 건강한 아줌마가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걷고



카페를 지나쳤는데 어린 아기가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을 지나.



골목 쪽으로 들어서면 내 뒤로 다가오는 자전거 하나. 자전거는 횡단보도를 건너 나와 멀어진다. 자전거를 탄 노인은 비쩍 말라있다. 운동을 많이 했나.



오늘은 순대트럭도 타코야키 트럭도 없었는데 내 손에 있던 커피를 나는 다 마셔버렸고 무언가 허전해서 다시 카페에 들러 브리또를 샀다.



주문한 브리또를 기다리는데 헉헉 대며 들어오는 카페의 사장과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라고 하는 아르바이트생. 대량 주문이 들어왔나보다.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브리또를 건네주면서 하는 말. “많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나?



최근에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언제였을까?



카페를 나오자 골목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와 과제 이야기를 하는 대학생 두명을 지나치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장을 입은 남학생과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찍으러 가거나 큰 일이 있거나.



집으로 돌아왔고



새로 화분을 갈아준 선인장을 창가 맡에 두곤 사진을 찍었다. 이제 레포트를 써야지. 생각만 하고 유튜브를 보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리고.



내가 오늘 지나친 사람들은 잘 자고 있을까.



아빠가 용돈을 줬다. 저녁을 잘 먹으라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있다. 등산을 갔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나랑 상관이 있으면서 상관이 없게 느껴지는 건 내가 경기도에 있기 때문이겠지.



어제는 무얼 했었나. 농구코트가 있는 공터에 갔었다. 남자아이가 혼자 공을 차고 있었고 남학생 두명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남자아이가 찬 공은 담장 너머로 빠져버렸고 남자아이는 낑낑대며 혼자 힘으로 공을 꺼냈다.



십 분 즘 지나 남학생 두명이 던지던 야구공도 똑같이 담장 너머로 빠져버렸고 남학생 중 하나가 담장 너머에서 공을 찾으려고 벽을 올라섰다. 나는 셀카를 찍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나에게도 저런 공이 분명히 있다.



레포트를 쓰지 못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아무것도 안 한게 아닌데 아무것도 안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 우울한 것도 지친 것도 아닌 이 감정은 뭘까.




내가 오늘 본 것들



그 중에 몇개나 나는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스물 일곱이다. 지금은 이천이십사년이고.



하지만



가끔 이상하게 오늘을 살고 있으면서도 왜인지 회상하는 느낌이 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상당하는 느낌.



마치 2090년 즘의 내가 이 날을 회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이 흐릿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난 오늘의 명도를 높이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 말과 말이 섞여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타임루프를 한 드라마 주인공이 처음 하는 일이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지금 몇년도냐고 묻는 것처럼.




알 수는 없지만 알 것 같다.




알 것 같지만 모르겠다는 말과 알 수는 없지만 알것 같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



가끔은 다신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말을 건다. 그땐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혹은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아니면 원망을 하거나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다 소용 없지만 마냥 소용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제는 누가 나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누가 이 글을 읽어줄 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강은 알 것 같다.



레포트를 못 썼기 때문에 내일은 꼭 써서 제출을 해야겠다. 소설을 못 썼기 때문에 내일은 조금 더 써야겠다. 밥을 잘 못 챙겨 먹었기 때문에 밥을 잘 챙겨 먹어야겠다. 그리고




사람을 더 사랑해야겠다.




무언가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요즘엔 렌즈를 너무 오래 껴서 눈이 아픈데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수면 안대를 사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내일은 수면 안대를 사야겠다.



나를 잘 챙겨야 남도 잘 챙길 수 있다.




다행히 나는 요즘 나랑 잘 놀아준다.



늙어가는 것의 장점이다.



나를 더 알아가는 이 느낌이 좋다.



더 늙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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