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1. 오후. 강의일기

친절한 반응, 고마워요!

by november

강의 주제는 텍스트언어학의 연원, 인접학문들.


시중에 텍스트언어학 서적들을 구할 수가 없다. 개론서가 전부 절판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절판 아닌 책을 교재로 선정했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책을 구비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을 것으로 예싱되어 소논문 한편과 교재가 아닌 다른 개론서의 일부를 스캔했다. 요약본을 올려주는 것보다 이게 낫다. 나중에라도 스스로 한 번 더 읽어볼 수 있을테니.


각종 이론의 연원을 살피고 그 역사를 훑어보는

것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내용이다. 재미있다. 아주 좁은 학문 분야더라도 결국 그 당시 주류로 행해지던 사조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인접 분야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좁은 물줄기가 여기 저기 흘러내려 거대한 강물을 이루듯 시대를 풍미한 사상사도 그렇게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보는 그 시간이 좋다. 나는 감히 흉내내기도 어려운 깊은 궁리. 번뜩이는 지성과 끈질긴 사유를 지닌 석학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론을 벼려 세상에 내어놓고 그것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이 지금 내 눈앞에 이런 학문의 틀로 당도한 것이다.

제 흥에 겨워 이야기를 막 풀어가다가 수강생의 물음표 가득한 얼굴을 보고 말았다. 흠칫 놀라고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의 맥이 빠지고 꼭 해야할 중요한 부분을 잊어버리고 말이 꼬이고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래, 내용이 어렵지. 내가 그 세부 분야들을 다 공부한 것도 아니니 다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내가 이해한 바를 주루룩 꿰어 설명할 뿐이니 심드렁해지기도 했겠지. 수강생의 90%가 외국인인 상황에서 독일어 중심의 학문 분야를 한국어로 설명하는 강의. 뭐라는지도 모를 내용을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수강생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고 마음만 타들어간다.


아, 오늘도 망한 걸까. 흥도 자신감도 다 잃어버리고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되는 걸까. 이런 강의를 한 날은 열패감에 휩싸여 하루를 정리할 마음도 기력도 다 사라져버리는데......


다행이 아는 개념, 아는 학자가 등장하여 빙그레 웃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수강생을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의도했을 듯한 친절한 반응!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 그리고 그 친절한 반응 덕분에 무사히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의 후 허탈감과 무기력에 빠져 식사도 거르고 아이 돌봄에도 손을 놓아버리는 그런 날이 될 뻔했다. 그러나 모니터 너머로 보여준 한 명의 친절한 반응이 오늘을 정리하고 지금 이 글을 쓸 기력을 남겨주었다. 이글은 온전히 그의 친절에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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