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 길 사계(四季)

by 문예반장

아침저녁으로 바위산 옆 개울에 살얼음이 덮였다. 애장골 빽빽한 나무 틈새로 드문드문 잔설이 보여도 월산 넘어 도착한 바람은 벌써 온기를 뿜고 있다. 따뜻해진 구름이 나직한 비가 되어 세상을 적신다. 계곡물이 불어가면서 흐르는 물소리도 요란하다.

겨우내 숨죽였던 들판에 파란 쑥이 돋아나고 겨울잠 덜 깬 개구리가 어리바리 헤맨다. 물 오른 갯버들이 뽀얀 솜털을 내밀고 서둘러 핀 개나리가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꽃봉오리 맺힌 매화나무 뒤편 멀리 산 중턱 진달래도 금방 붉게 타오르겠다.

대여섯 달 말랐던 들에 물대기가 시작됐다. 질퍽대는 논바닥에서 소코뚜레를 코에 걸고 쟁기를 끄는 누렁이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되새김질하기 바쁘다. 쇠고삐를 한 손에 잡은 아저씨의 ‘워워' 외침이 안쓰럽다.

등짝에 책보를 동여맨 아이들이 논두렁을 달린다. 사방으로 달아나는 개구리가 돌멩이에 맞거나 말거나 돌팔매질은 신난다. 놀란 개구리 뛰어내린 곳에서 겹겹이 퍼져가는 동그라미 밖으로 소금쟁이도 덩달아 튄다.

모내기 끝난 논바닥에 거머리가 꼬물거린다. 초록 물뱀도 제 세상을 만났다. 지난 며칠 밤새도록 개구리 울음 소리가 시끄러웠다. 새까만 올챙이가 물 밑에 가득하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신작로 끝에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오른다. 나른하다.


하늘 높이 따가운 곳에서 잠깐 움직임을 멈춘 종달새가 땅으로 곤두박질한다. 아카시아 흰 꽃을 손가락으로 한 움큼 훑어 씹으면 입술은 요술처럼 보라색으로 변한다. 보라 향기가 어찔하게 황홀하다. 콧잔등 구슬땀을 한 손으로 훔치다가 먼 산 뻐꾸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엄마가 기다릴라, 걸음을 서두른다. 익숙한 허기짐으로 세상이 어질어질하다. 찬 물에 쌀밥이나 한 보새기 뚝 말아 먹었으면.

해가 길어졌다. 얼굴 까맣게 그을린 애들이 한길에 모여 짱깨미뽀 한방에 거품을 게운다. 꼴등한 아이가 다음 전봇대까지 낑낑거리며 책보를 옮겨간다. 상고머리 위까지 자란 밀밭 고랑 사이로 꼬마들이 줄기를 헤치며 신나게 달음박질 한다. 수염 달린 밀 이삭이 부드럽게 얼굴을 훑어 지난다.

한길을 벗어나 산비탈로 올라간다. 끝물 아카시아 꿀이 달다. 산딸기도 널려있다. 잔가시 안보고 급히 내민 손등 위로 핏방울이 솟는다. 입으로 피를 빨면서 언덕을 내려와 두 손을 물속에 담근다. 가시 긁힌 생채기가 따끔하다. 손바닥 가득 물을 퍼마신다. 배부르다. 내친 김에 멱이나 감자며 아래 위 홀랑 벗어젖히고 개울물로 뛰어든다.

멀리 들판 끝에 먹구름이 보였다 싶으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소나기가 몰려온다. 젖은 책은 집에 가서 마룻바닥에 널어 말려야지. 흙탕물에 젖은 발바닥이 하얗게 불어있고 발등 신발 선에 때 국물이 꾀죄죄하다. 고무신을 벗어 올챙이와 송사리를 그 안에 잡아넣는다.

동네 어귀 통나무 다리가 물에 잠겨 삐딱하다. 건너갈 엄두를 못 내고 개울가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종알거리기 시작한다. 게으른 햇살에 묻혀 아이들 수다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아직 잦아들지 않은 물소리가 귀를 때린다. 살살 졸리다. 상급 학년 엉아들이 곧 오겠다.


하늘이 부쩍 높아간다. 누가 심었을까, 코스모스는 알아서 피어나고 저절로 쑥쑥 큰다. 겨울 동안 어디 갔다 오는지 궁금하다. 늦가을 꽃이 질 때 근처에 숨어 있다가 쫓아가보고 싶다. 신작로 따라 가로수 아래 낙엽이 쌓여가고 앙상한 미루나무 가지에 가끔 조각구름이 지나간다. 이파리가 남아있지 않다. 한겨울 되면 어쩌려고.

상여간 뒷산에는 밤나무가 널려있다. 밤 주워 먹을 재미에 힘들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가끔씩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밤송이가 툭툭 떨어진다. 가시 찔린 손이 따끔거리고 살 속에 파고들어 지근거린다. 빨간약을 발라야겠다.

추수 끝난 들판에 허수아비 홀로 외롭다. 은행 잎사귀가 길바닥에 쌓일 즈음 감도 따라 익어가고, 수확 끝난 고구마 밭에서 애들은 맨 손으로 흙을 판다. 재수 좋으면 대여섯 개쯤 더 캘 것이다. 빈 벌판에 메뚜기가 제 철이다. 빈 깡통에 못 구멍 잔뜩 내어 메뚜기를 잡아넣고 군불을 지핀다. 메뚜기가 깡통 속에서 뜨거워 날뛴다.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맛은 고소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침쟁이 할아버지네 사람 없는 빈집 뜰에도 가을꽃은 예쁘게 피어난다. 늙은 대추나무에 열매가 늘어지게 달렸다. 슬쩍 몇 개쯤 따갈까 하다가 그냥 간다. 침 맞을 일 없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왠지 허전하다.

간밤에 함박눈이 내렸다. 온 천지가 하얘졌다. 눈덩이가 초록 향나무에 엉기성기 앉았고, 양철지붕은 햇빛 받아 눈부시다. 애들 발자국이 운동장 곳곳에 어지럽게 널렸다. 처마 아래 고드름을 언 손으로 떼어내 밑동을 붙잡고 한입 베어 물면 진저리나게 이가 시리다. 냇가 얕은 물엔 마른 살얼음이 등고선처럼 덮이고 그 아래 물고기들이 봄 되기 전에 얼어 죽을까 애들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훔쳐온 성냥으로 잔가지를 긁어모아 불을 지핀다. 매운 연기가 눈을 찔러 대고 마른 눈물이 한참 흘러나온 다음에야 불꽃은 겨우 살아난다. 불 주위로 빼곡하게 둘러앉은 꼬마들이 몸을 녹이려고 엉덩이로 어깨로 몸싸움을 한다. 얼어버린 논바닥 위에 지난 가을 추수 때 잘려버린 벼 밑동이 상투를 틀었다. 아버지는 신발 닳을까봐 미끄럼질을 하지 말라 하셨다. 그래서 천천히 살살 탄다.

동네 입구 하꼬방 앞, 잿빛 하늘이 사뭇 짙고 바람도 세다. 썰렁한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굵어진 눈발이 나비처럼 펄렁인다. 잘하면 내일은 학교 가지 않아도 되겠다. 산골짝 어둠은 별똥별처럼 빠르게 내린다. 살을 에는 눈보라도 매섭게 몰아칠 것이다. 안방 아랫목 담요가 따듯하겠지. 마음이 바빠진다. 희뿌예진 앞산 꼭대기로 하얀 눈송이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공일날엔 엉아들 따라 산토끼 잡으러 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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