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재 신화

by 문예반장

해질 무렵 가까워서야 아버지는 느지막이 대문을 나선다. 특별한 날에만 가끔 입는 단벌 양복차림이다. 구겨진 재색 상하의가 후줄근하고 넥타이도 칙칙하다. 엊저녁 늦게 아버지가 집에 도착하면서 집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가까운 일가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얼핏 들었다.

폐병으로, 무장간첩이 쏜 총에, 광부들이 무너진 굴에서, 태풍과 장마에 휩쓸려, 깨알같이 많은 이유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그래서 내게 죽음이란 때 되면 찾아오는, 사람이 피해갈 수 없는, 밥 먹고 잠을 자는 것과 다를 것 없다. 이삼 일 지나가면 상여가 또 나가겠거니, 초상났다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따라 앞서 출발하려니 어림잡고 있었다.

백 리 넘는 곳이었다. 낭떠러지 위 좁은 샛길과 나뭇가지가 길 복판까지 늘어진 황토 길을 버스는 느릿느릿 달린다. 차창 멀리 불빛이 지나간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기 몇 번, 희미한 갓등 아래 시골 정류장이 보인다. 덜컹거리던 버스가 브레이크 소리 요란하게 멈춰 선다. 정류장 앞 구멍가게가 제 자리에 앉아있다. 대뜸 반갑다.

데면데면한 부자간의 인사가 끝나면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하꼬방으로 들어갔다. 오꼬시(밥풀과자), 어김없이 그 과자를 영락없이 딱 한 봉지만 집어주었다. 어둔 불빛 아래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아저씨 하나가 가게 안을 흘낏대곤 했다. 할아버지 가는 곳에 웬만하면 나타나던 그를 동네 사람들은 창새기(창석이)라 불렀다. 벙어리이며 색시 없이 혼자 사는 먼 친척이다. 세 살짜리 덩치 큰 애처럼 고함지르며 날뛰는 모습이 무서워 가까이 하기 싫었다.

시골집에 오면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안채 깊숙한 방에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식구 대하듯 했고 나처럼 펄펄 뛰며 싫어하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사준 내 오꼬시를, 어른들이 나한테 묻지도 않고 몇 개씩 그에게 내주는 것도 언짢았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할아버지의 다독거림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버스를 내린다. 정류장이 썰렁하다. 웬 일인지 오늘은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아프신가. 생각만 그렇고 난 묻지 않는다. 아버지도 말없이 한길을 건넌다. 어버버 창새기가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따라 집안 행사 때마다 오갔던 길이다. 낮이면 걱정 없는데 늦은 밤에 도착할 때가 문제였다. 아버지 걸음에 맞춰 뒤처지지 않으려고 달리다시피 아버지를 쫓아가곤 했다. 아버지의 손에 끌려간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가파른 언덕길은 으스스했다. 겨울철에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겁났으며 여름철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어대는 새소리가 무서웠다.

한두 번 오는 곳이 아니련만 마을 입구에서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새가슴은 구렁재 위에 커다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고목을 마주치면서 숨이 멈춰버릴 듯 갑갑하다. 한 손으로는 아버지의 손을, 다른 손으로 아버지의 바지자락을 움켜쥔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언덕길이라 구렁재인지, 커다란 고목이 언덕에 구렁이마냥 떡 버티고 있어 구렁재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구렁재는 끔찍하다.

귀신이라는 것이 없는 줄 알 나이가 되고도 나는 구렁재가 줄곧 싫었다. 내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아버지에게 작은 말 샛길로 돌아가자고 여러 번 징징거렸으나 아버지는 예나 게나 똑같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내 성화가 귀찮았던지 어느 날 아버지는, 그 길로 가면 상여집이 나온다며 말문을 막았고 그 후로 나는 다른 길로 가자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구렁재를 지나고부터는 내가 앞으로 나선다. 뛰듯 걷는다. 구렁재 귀신은 뒤쪽의 아버지 몫이고 나는 마당 가운데 등불이 환히 켜진 시골집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무서운 것 하나는 아직 남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이제는 내가 앞장선다.

마당 복판에 천막을 세웠고 집 곳곳에 석유등이 걸려있다, 지지미, 고기와 술 등 친숙한 냄새를 맡으며 그제야 우리 집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걸 실감한다. 대청에 걸터앉았다. 이런 날 빠짐없이 나타나는 창새기가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대문을 통과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꼬시 봉지를 손에 들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신발 한 짝은 또 어디 두고 다니는지...

문지방을 넘어 골방으로 숨는다. 창새기가 나를 봤다. 무섭다. 다락방으로 옮겨간다. 그가 쫓아온다는 무서움과 구렁재를 통과할 때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감기라도 걸린 듯 열이 오르고 머리도 아프다. 아마 꿈이었을 것이다. 나를 찾아낸 창새기가 뭔가를 내 발밑에 내려놓더니 소리 없이 다락방을 빠져나간다. 기운이 쪽 빠지면서 눈이 절로 감긴다.

이른 새벽, 희미한 햇살이 다락방 쪽문을 비스듬히 비집고 들어와 구렁재의 고목이 구렁이 아닌 나무로 보이기 시작하고 새들 지저귐이 더 이상 귀신의 울음으로 들리지 않을 무렵 나는 눈을 떴다. 뜯지 않은 오꼬시 한 봉지가 발끝에 걸린다. 창새기, 오꼬시, 다락방 등 낯설다고 느끼는 익숙한 낱말들이 순서도 없이 머릿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다락방 쪽문으로 기어간다.

“하라부지는 오디 갔대유?”

마당 절구통 앞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할머니 표정이 곱지 않다.

“애비 아니고? 쟤도 참... 꼭두새벽부터 뭔 할배 타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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