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선생님

by 문예반장

박카스 선생님

마지막 시간, 눈꺼풀이 무겁다. 산수 선생님이 교탁 위에 놓인 유리병 뚜껑을 단번에 돌려 땄다.

“이게 뭐니? 어쩌라는 건데?”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겹겹이 퍼진다.

“선생님 마시래요.”

“아무렴, 그렇겠지! 오늘은 어느 집 어르신께서 납시셨냐?”

“몰라요. 물 대기 바쁘다며 후딱 가서. 우덜 공부나 잘 가르치래요.”

뒷자리 건들거리는 애들 몇이 머리를 숙이고 킥킥 웃는다.

“안다, 이놈아. 다음엔 꼭 여쭤서 알아놔. 인사는 드려야지.”

“근데, 선생님. 그게 약이여요 사이다예요?”

“그거 알아 워따 써 먹게?”

“옆 반 선생님이 공갈치는 것 같아서요. 어른 돼야 먹는 약이라고.”

“저 녀석 말 싸가지 좀 봐라. 진짜다. 배탈 나, 애들은.”

종례 겸한 수업이 설렁설렁 끝나고 차렷 경례가 끝나기 바쁘게 맨 앞자리 꼬마가 선생님이 교단 위에 놓고 간 빈 박카스 병을 냉큼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서로 병을 차지하려고 한바탕 법석을 떤다.

비 갠 오후, 집엔 아무도 없다. 나른하다. 툇마루에 누웠다. 덩어리 구름이 산머리를 타고 앉았다. 그 너머는 아버지가 일하는 광산이다. 지붕 밑으로 새 두 마리가 바지런히 들락댄다. 조만간 새끼들 짹짹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겠다. 어두운 방 안으로 눈길을 옮기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장롱 위에 앉아 있는 작은 병 하나, 이불 한 채와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가 까치발로 서서 끄집어내렸다. 마개는 어디 가고 병목을 비닐로 덮어 명주실로 칭칭 감아놨다. 박카스다. 비닐을 벗겨 병아리 목을 축이듯 들이마셨다. 선생님도 그랬다. 누가 올라, 단번에 넘겼는데 교실에서 맡았던 그 향긋함이 없다. 역한 냄새가 풀풀 났으며 색깔도 누리끼리했다. 박카스는 미끄덩거리지도 않았는데, 애가 먹으면 안 된다던 선생님 말씀이 옳았지.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옆집 아줌마가 엄마를 데려왔다. 바닥에 구르는 빈 병, 베개와 이불 그리고 놀라 자빠진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바탕 지청구를 퍼붓는다.

“얘, 미쳤어! 뭐하러 천장까지 겨올라 난리야? 환장헌다, 환장혀!”

내가 아픈지 어떤지 엄마는 묻지 않았다. 광천 다리 밑에서 줘온 애라더니. 뒤늦게 아버지가 대야를 들고 왔다. 속을 비워야 편하다며 연하게 만든 양잿물을 내밀었다. 통째로 들이켜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반 죽어 떼굴떼굴 뒹구는 내 앞에서 아버지는 엄마를 쥐 잡듯 닦달했다. 뻔히 손닿을 곳에 재봉틀 기름을 놔둬서 애새끼 죽일 작정이냐, 대체 생각이 있이 사느냐고 퍼부었다. 혼나 기죽는 엄마를 배때기 움켜잡고 드러누워 실눈을 뜨고 훔쳐봤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최고다. 쩔쩔매는 엄마가 불쌍해 보였지만 속으론 고소했다. 깨소금 맛이다.

방학 보충 수업, 오전부터 늘어진다. 국어 선생님이 출석부로 텅 빈 교탁을 툭툭 친다.

“어디 갔냐? 오늘은 당번 없어?”

애들이 키득댄다. 반장이 머리 긁으며 일어나 한 아이에게 눈짓을 주며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공부만 열심히 하다 보니 깜박 잊었습니다. 다들 수험생이잖아요.”

“그렇지? 열심히 해야 하고말고. 그래야 좋은 대학 간다.”

다른 애가 거든다.

“근데 선생님, 그거 꼭 마셔야 맛입니까?”

“윤활유 같은 거다. 기름을 쳐줘야 뭐든 부드럽게 굴러가지. 수업도 그렇다.”

“아 참나, 선생님만 마시잖아요. 우리 입은 입도 아니냐고요?”

“어허, 저놈 말 싸가지 봐라. 선생하고 학생이 똑같냐? 고얀 것.”

급히 뛰어나갔던 당번이 박카스 세 병을 들고 왔다 선생님은 한 병을 따 훌쩍 들이키더니 전국최고의 명강의를 시작한다. 기미 독립 선언문이 입시 단골 출제 문제임을 서너 번에 걸쳐 강조한다. 맨 앞자리 애가 병 하나를 또 들어 마개를 따서 공손하게 내밀고는 묻는다.

“선생님, 그거, 중간고사에 나오나요?”

“흠, 딱히 예스냐 노냐 알려줄 수 없으나, 네 마음을 어엿비 너겨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믿습니다. 스승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존경합니다.”

중간고사 때 선생님은 독립 선언문 지문을 이용한 문제를 세 개나 출제했다.

조직폭력배 간 갈등을 다룬 영화 ‘강릉’에서 장혁을 제거한 유호성이 일갈한다. 이 세상의 낭만은 씨가 말랐다고. 어디 암흑가에서만 이 말이 통용될까. 요즘 이 말을 붙여서 어색하지 않을 일이 내 눈에도 많아 뵈지 않는다. 학생과 선생님 간에 악의 없이 던지고 모른 척 받아주던 그 시절 따듯함이, 방식의 문제일 뿐 지금이라고 없을까만 난 내 머리에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잔챙이 기억이 더 좋다. 숨겨둔 보물 보듯 두고두고 꺼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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