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외출

by 문예반장

찬란한 외출


월산은 깊었다. 하늘을 빽빽이 뒤덮은 나무 아래 좁은 길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반짝이는 햇살이 이따금 따발총처럼 쏟아졌다. 낮인데 어두웠고 발아래 걸리는 것 많아 앞 사람 등짝을 따라 무작정 걸어야 했다. 소풍, 그딴 게 뭐라고 일찌감치 집어치웠어야지, 뭘 얻어먹겠다고 목줄 매단 염소 새끼처럼 질질... 처음부터 올 게 아니었다.


차부 앞 윤 병원 집 딸 미순이는 서울에서 살다 내려온 우리 반 애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가 고르고 옆머리에는 헝겊 리본을 달았다. 귀여운 애가 무용도 잘하고 노래까지 잘 불러 학교 행사 때마다 인기가 최고였다 ‘그래 봤자 제깟 게’, 무시하는 척했지만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슬그머니 얼굴을 돌리곤 했다.

앙가목골 산골짝에서 광산 앞으로만 내려가도 거기 사는 누나들은 영화배우처럼 머리칼이 출렁거리고 얼굴색이 빛났다. 그중 미순이를 친동생처럼 끼고 다니는 누나 하나가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주일날 월산에 같이 가자고 내게 말을 붙였다. 교회를 안 믿는 내가 미순이도 소풍을 올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배당은 연애당이라던 동네 어른들 얘기가 그제야 떠올랐다. 한번 결심하고 보니 웬만한 거짓말쯤이야 바닥 짚고 헤엄치기였다. 공일날 아침 집에다 얼렁뚱땅 둘러대고 약속 장소로 갔다. 내가 아는 동네 누나 형들과 친구까지 바보처럼 왜 거기 와있는지 답답하고 뜨끔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미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누나 선생님께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쏙 달아났다. 며칠 새 거짓말이 팍 늘었다. 금방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활명수 한 병을 주며 다 왔다고 조금만 참으랬다. 어른들이 뒤로 머리 젖혀 들이킬 때 꼴깍 침 삼키게 했던 유리병 안 꺼먼 물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콸콸 내려갔다. 기분은 좋았다. 씁쓰름하면서 톡 쏘는 맛이 딱 한 번 마셔봤던 콜라 비슷했다.

심심했다. 미순이도 없고, 금방 도착? 거짓부렁인 줄 알았다. 배탈약까지 한 병 얻어먹은 죄로 도망치기는 미안했다. 이래저래 한참 더 걸어 도착한 넓은 빈터에 돗자리를 깔고 다들 얌전하게 둘러앉았다. 기도합시다! 목사님이 두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 나는 양손을 턱 밑에 붙여 눈을 반쯤 뜬 채 사람들을 몰래 쳐다봤다. 노래도 배웠다. ‘즐거운 여름학교 하나님의 집. 아아, 진리의 ~~~’

그냥 갔으면 억울할 뻔했다. 입맛 다시며 보기만 했던 크라운산도, 생과자, 사과와 사이다, 그리고 김밥까지 먹을 게 널렸다. 신나는 한편 도망갈 거라는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우선은 밥부터 먹고. 그러나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보물찾기입니다. 도장 찍힌 하얀 종이만 찾아와요. 거기 적힌 대로 선물을 줍니다.”

점심 먹고 내빼기는 글렀는데 종이 쪼가리까지 나를 약 올린다. 겨우 찾은 한 장이 '꽝'!

마침내 때가 왔다. 자유 시간! 멀리 가지 말고 호루라기 불면 모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산 아래로 또 아래로 올라온 길을 더듬어가며 내달렸다. 자빠져 굴러도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누군가가 쫓아오면, 엄마가 눈치채서 아버지한테 일러바치면 어쩌나. 아, 괜히 왔네. 아무런 잘못 없는 두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괘씸한 지지배... 나쁜 선생님...

얼마나 뛰었을까, 산 아래 개울 건너 나 태어난 청룡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는 사람 만날까 먼 산모퉁이를 돌아 옥분이 고모네 집 쪽으로 피해간다. 흙벽돌 담장 안이 조용하다. 살금살금 마당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바가지째 퍼마시고는 다시 걸음을 서둔다. 산등성이 두 개만 넘으면 우리 동네, 여기서부터는 눈 감고도 집에 갈 수 있지. 틈틈이 뒤쪽을 살핀다. 나 잡으러 온 선생님은 아직 없다. 내가 없는지조차 모를 거다.

종다리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멈춰서 망을 본다. 저러다가 새끼 있는 제집으로 날아간다. 누군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는 어미가 나를 향해 직선으로 별똥별처럼 빠르게 내려온다. 바싹 웅크렸던 바로 옆 풀더미 속이 새집일 줄 몰랐다. 새끼는 없고 알 몇 개만 나란히 앉아있다. 집어 가려다 그만둔다. 어미 새가 아플 거야.

터벅터벅 걷는다. 새소리만 시끄럽고 지나는 사람 하나 없다. 걸음을 뗄 때마다 빛줄기가 번쩍여 눈부시다. 풀, 나무와 어깻죽지로 펄펄 쏟아졌다가 다시 사방으로 툭툭 튀어 오른다. 산이 나를 싣고 가나, 배가 고픈가? 핑 돈다. 꽃은 참 환하기도 하지. 빨강 노랑 분홍 보라, 그 말고도 이름 모르는 색깔로 눈 닿는 곳마다 피어있다. 초록도 진하네. 방학이 곧이겠다.

깜깜한 밤 가끔 도깨비불이 훨훨 타오르던 골짜기 옆 언덕배기를 지난다. 사택이 늘어선 우리 동네가 성냥갑만 하다. 한숨을 내쉰다. 엄마와 연애당, 이쁜 애도 잠깐 까먹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산등성이 몇 개 너머 월산 꼭대기가 희미하다. 종아리도 아프고 이젠 천천히 가야겠다. 풀더미 위에 벌렁 드러누워 작은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바람이 온다. 파란 하늘 아래 조각달이 높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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