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안경을 써. 난시가 심해졌거든. 가끔씩 너는 나를 원망하는 말투로 삑삑 안경을 닦으며 말하곤 했지.
“평생 눈이 좋았던 너는 안경 닦는 서러움을 몰라.”
너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 주었지. 너만의 방식으로. 육 년을 사귀면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몸소 느끼고 있었기에 사랑에 대한 진심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었어. 너는 내가 배고프다 하면 밥을 지어주고, 추운 겨울에는 패딩 점퍼를 사주고, 내가 어디선가 데이고 돌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면 닦아 주었으니까.
너는 내가 무언가를 항상 탐구하고 관찰하며 마주하는 상대를 오롯이 바라보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감탄했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가만히 침묵하고 거짓 없는 나의 특성을 참 좋아해 주었다. 동시에 싫어하기도 했어. 순진하고 답답한 모습으로 너를 가슴 졸이게 만들었지. 마음 한편에 걱정이라는 탁구공만한 먼지더미를 농구공만하게 만든 다면서.
우리가 이별한 이유도 돌이켜보면 참 어른스러운 연유였어. 좋아하네, 마네 하는 애정 싸움이 아니었지. 너는 내가 제대로 된 직장을 갖고, 작업하기를 바랐지. 언제까지나 네가 나를 돌봐줄 수는 없었으니까. 마냥 옆에서 나를 나를 지켜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니까. 세상을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
나는 마침내 직장을 구했지만 네게 바로 말할 수 없었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니… 나도 내 자신을 믿지 못했던 거지. 다툼 속에서 끄집어낸 소식을 너는 끝내 믿지 않았고, 우리는 미련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대로 끝내버렸다. 우리가 긴 시간을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해. 그렇지?
그렇게 너 없이 새로 시작된 삶은 놀라울 정도로 잘 굴러갔다. 운이 좋게도 일을 꾸준히 다녔고, 그로 인해 안정된 벌이는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게 했으며 남는 시간에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새로 배운 수영은 너무 재미있어 이별 후유증도 느끼지 못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어. 나는 이제 여름만 되면 바다랑 수영장에서 살아. 너는 아직도 물을 싫어하니?
그리고 마침내 내 작업은 빛을 보았어. 까만 영화관에서 네 얘기로 만든 내 영화가 관객들을 비출 때, 너를 연출하고 그릴 수 있음에 감사했어. 나는 이 소식을 네게 알리고 싶었으나 어떠한 방도가 없었어. 네 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생각난 너의 메일주소. 언젠가 미술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네 메일로 보냈던 게 기억나 편지를 보낼 수 있었어. 놀랍게도 다음 날에 바로 답장이 왔지. 너다운, 아주 담백한.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네 메일을 읽으며 펑펑 울었지. 누가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네 영화를 아주 잘 봤다. 잘 만들었더구나. 진심으로 기뻤다. 축하한다.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쭉 열심히 해라. 돈 좀 벌고! 어디 가서 너무 순진하게도 굴지 말고! 너는 너무 착한 것좀 고쳐라. 몸 건강히 지내. 답장은 하지 말고.”
네가 곁에 있을 때 잘 되었으면… 싶었지만 네가 없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지난날의 우리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아깝지가 않다. 세월이 흐를수록 널 닮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게 참 신기하다. 원망하는 말투로 안경을 닦는 서러움을 토로하던 너는 그 순간에 내가 어디가 미웠던 걸까? 반추해 보니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받은 내가 조금은 부러워서였을까?
앞으로도 사랑하며 추억할 너를 떠올리며.
정보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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