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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May 13. 2019

아기가 사라진 게 끝이 아니었어

계류유산, 약물 자연 배출을 처음 겪는 이들에게

발리에서 답답했던 만큼 한국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에 차라리 남편과 나는 속이 시원해졌다.

아이는 사라졌구나, 하는 슬픔에 잠겼던 우리는 애초에 아기가 생긴 게 아니었다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거기까지 우리는 유산이란 이런 거구나, 우리가 이런 일도 겪는구나, 그 정도의 마음으로 마무리지어지는 줄 알았다.


서른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산이라는 경험을 한 이들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 가까운 친구가 한참 지나 유산을 했었다, 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막연히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부분에서만 안타까워했었다. 나에게 막상 그런 일이 생기자, 안부를 전하는 이들의 위로 역시 그 정도였다. 유산이란 마음이 다치는, 그런 일인 줄만 알았다.


안 겪어보면 영영 몰랐을 과정,

유산 뒤에는 실제 '임신이었다'는 사실이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된 줄 알았던 나의 몸은 임산부와 동일하게 호르몬이 변하고, 자궁 상태에도 큰 변화를 맞았다. 막상 유산이 된 후 나조차 그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아기가 사라진 것으로 끝난 줄 알았던 유산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다음 과정들이 남겨져 있었다. 한 단계 한 단계 벗겨지는 과정 속에 처음 놓인 나는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어야 하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그 궁금함은 앞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했다. 앞으로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 나의 몸과 마음은 어떤 변화가 생길까, 짐작이라도 가능한 정도의 얕은 정보라도 붙잡고 싶었다. 명상을 좀 더 했더라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 받아들이겠노라, 기다릴 수 있었을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힘이 조금은 더 생겼을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것 같다. 그리고 같은 경험을 공유해준 블로그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물론 그 역시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을 얻을 순 없지만, 오히려 병원에서보다 리얼한 정보도 얻었고, 위로도 받았다.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나가던 이들은 임신 소식을 알았던 병원에서 유산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담당 의사들이 엄마 탓 아니에요, 그런 말도 해준다던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의 병원에서도 나는 위로의 말은 뒤로하고, 원하던 만큼의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해 답답했다. 의사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병원에서 위안을 찾았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총 3개의 병원을 갔었다. 발리에서 한국에 오면 어떤 병원을 다녀야 할까, 고민을 했었다. 원래 몸이 약한 편인 데다 나이도 있으니 바로 대학병원처럼 큰 데로 가보는 게 좋을지, 왔다 갔다 하기 좋게 동네에 있는 병원이 좋을지.

대학병원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병원비도 더 비싸다고, 해서 일단은 집 가까이 위치한 산부인과를 가봐야겠다 했었고, 다행히 집 가까이에 출산까지 진행하는 꽤 큰 규모의 산부인과가 두 곳이 있어 어느 곳을 갈까 고민 중이었다.


아침에 한국에 도착해 집에 와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진통제를 먹은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다시 통증이 시작됐다. 급하게 마음에 정해두었던 산부인과로 갔다. 초음파 검사를 다시 하고 의사는 아기집은 커진 상태지만, 그 안에 아기는 보이지 않는다고, 아마 처음부터 잘못 임신이 된 경우일 거라고 했다. 자연유산이라고. 아기집의 위치가 자연스레 빠져 나올 것 같으니 일주일 정도 기다려보고 소파술을 할지 다시 한번 보자고, 타이레놀은 얼마든지 먹어도 되니 진통제를 복용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병원을 오라 했다.


이쯤에선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오히려 속이 후련해져 버린 우린 마음을 편히 먹고 의사 말대로 하려고 했다. 별수 있나. 발리에서 준 호르몬 약은 안 먹어도 되겠네요? 네, 지금으로썬 의미 없습니다. 통증이 심할 때 무슨 좌약을 줬어요, 그거 임산부들에게 쓰는 좌약인데, 통증 하고는 상관없어요. 아아 발리 병원, 아무리 시골 병원이라지만, 그 젊은 발리 의사.. 경력이 있긴 한 거겠지, 괜한 원망은 눌러 담았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들의 처치에 크게 잘못된 점은 없었다. 더 센 진통제를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진통제 한알로 6시간 정도 괜찮을 수 있는데, 과잉 처방될 필요는 없었으니까.


새로운 변수는 나의 엄마였다. '큰' 병원을 고집하는 엄마 성화에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을 예약했는데, 그 사이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과연 일반적인 유산의 과정인 걸까 의문이 생긴 거다. 이대로 예약일을 기다리며 가만 있어도 되는걸까?

정보가 부족했다. 병원에서 유산 전반에 거쳐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준다면, 마음이 좀 더 놓이지 않았을까, 약해질데로 약해진 마음에 다시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고민 끝에 유산 경험이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친구 목소리를 듣자 울컥하고 다시 눈물이 났다.


유산은 출산이란 같다는 말,

유산으로 아기가 잘못되었어도 몸은 임신 상태이다. 나 역시 입덧 등 임신 초기에 겪을 수 있는 과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래서 유산도 출산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임신 호르몬으로 자궁벽은 한껏 두꺼워져 있었고, 그게 무너져내려 출혈이 심했던 것 같다. 자궁이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엄청나게 움직였을 테니 그 때문에 통증이 일어났던 거겠지. 평소에도 생리통이 심한 편이었는데, 그 몇 배는 되는 통증이었고, 식은땀이 흐르고 말이나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제발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임신 초기부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연유산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아이를 맞을 준비를 했던 마음이 주춤하게 되는 게 얼마나 슬픈건지, 이제야 몰랐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실제 아이까지 확인하고, 심장박동까지 들은 후 유산된 이들의 마음고생은 얼마나 더할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된 것 같다.


유산이 되면 마치 출산하듯 변했던 자궁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기집과 태반을 배출해내야 하고, 호르몬이 돌아오면서 점차 커졌던 자궁도 자기 원래 크기를 찾아야 한다. 과거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야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이 과정이 지나쳐갔지만, 그 경우 자궁 안에 피가 오래 고여있게 돼 염증이 생기기 쉽다고. 해서 현재는 이를 임의로 배출시키는 소파술이 진행된다.


당연히 소파술을 하는 건 줄 알았다,

며칠 안에 자연배출될 것 같다는 의사 말과 달리,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많이 줄었다.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성모병원을 좀 더 일찍 예약할걸 후회가 됐다. 일주일 기다려보자는 의사 말이 무색하게 4일 만에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대학병원 진료에는 진료의뢰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동네에 있는 다른 산부인과에 가보았는데, 거기에서는 나를 좀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차근차근 그동안의 과정을 물어봐줬고, 검진 후 유산은 확실한 것 같다고 확인시켜줬다. 좀 더 자세한 설명에 긴장이 좀 풀렸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좋지 않다고, 내일을 넘기지 않고 소파술을 하라고 권유받았다. 그리고 대학병원은 절차가 오래 걸리니, 차라리 차병원을 가면 진행이 빠를 거라고 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의사는 대학병원은 암 환자나, 그런 긴급 환자 보는 데지, 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그 말이 나에게는 유산 정도로 대학병원 가는 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거야, 라는 말로 들려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일반 산부인과에서 소파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예약도 하지 않아도 되니 금식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에 오면 된다고 했다.

금식하는 이유를 병원에서 말해주진 않았지만, 소파술은 수면 마취를 하기 때문일 거다.


두 병원에서의 진료만으로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아마 당연스럽게 소파술을 했을지 모르겠다. 나의 선택지는 기다려보는 것과 소파술 두 가지인 줄만 알았으니까. 성모병원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날 가까운 병원이나 차병원에서 수술을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소용돌이 속에서는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임신인 줄 알면서도 병원에 가보지 않았고, 아프면서도 응급실 갈 생각을 못했고, 유산이 되면 수술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사 말에 그래 맞겠지, 하고 말았다. 남편이 예약해둔 것이니 성모병원까지 가보고 최종 결정을 내려도 된다고, 말해줬다. 그제야 그 경우의 수도 있구나, 싶었다.


소파술과 약물 자연배출의 선택지,

대학병원은 정말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출산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하는 산부인과는 더더욱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기다려야 했다. 담당 의사를 만나기까지 초진 상담, 초음파 검사를 다시 거쳐야 했다. 그래도 보다 면밀하게 초음파를 하는 걸 보고서야, 아 취소하지 않길 잘했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예약 시간보다 서너 시간이 지나서 잠깐 만날 수 있던 의사는 몹시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약물 배출을 해보자는 새로운 선택지를 줬다. 자궁 안에 아기집은 길쭉하게 늘어져질 입구 쪽에 가까워져 있는 상태였다. 이럴 경우 자연 배출될 확률이 높다고. 처음 한국에서 병원을 간 날부터 정확히 일주일을 기다려보고, 그래도 자연배출이 안되면 약물을 사용하자고 했다. 자궁을 임의적으로 운동하게 만드는 약을 쓰는 거라고.


입원해서 할 수도 있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처음인 경우 입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피를 쏟게 되니 암만해도 혼자 하기에 겁먹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했다. 약물 배출은 90% 정도 성공확률이 있지만, 만약 약물로도 배출이 안되면 다시 수술을 해야 했다.

입원일을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찾아보니 성모병원이 유산 시 약물로 자연배출을 진행하는 대표적인 병원인 모양이었다. 일반 산부인과에서도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소파술과 약물 배출의 선택지를 주는 병원들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가격에서는 약물 배출이 월등하게 저렴했다. 다음 임신을 원하는 경우, 자궁에도 보다 건강한 방법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소모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개인차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 경우, 수면마취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피하고 싶었고, 막연하게 상상되는 수술 과정의 이미지가 꽤나 두려웠다. 약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방법을 택하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집이 너무 커진 상태라면 약물이 불가했다. 3개월이 넘어선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약물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고민 없이 약물 배출을 선택했다. 그땐 약물 배출의 과정을 상세히 몰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면 나는 좀 더 크게 고민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약물 배출의 과정

실제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사례들을 모두 찾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큰 병원으로 간 죄책감도 사라졌다. 병원에서 말해주지 않은 약물 배출이라는 게 어떤 과정인지도, 좀 더 상세하게 알고 갈 수 있었다. 많이 아프다길래 걱정되는 마음이 커지긴 했지만, 미리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어느정도 알고나니 내 경우 마음의 준비가 되는 편이었다.


결국 나는 입원을 했다. 예약했던 날에 병실이 나오지 않아 예정보다 하루 늦게 병원에 갔다. 입원실이 정리된 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오후 느지막이 입실할 수 있었다. 미리 알려준 입원 준비물을 챙겼다. 슬리퍼나 양말 같은 것, 그리고 발리에서와 다르게 병원에서 패드를 제공할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해야 했다. 간단한 입원 절차를 마치고 환자복을 입고 누웠다. 먹는 것과 진료 과정의 큰 관계는 없다고 했지만 적게 먹었다. 대신 다음날 수술을 하게 될 수 있으니 저녁 이후에는 물까지 마실 수 없었다.


자연배출에 쓰이는 약은 원래 위궤양 치료제이다. 한데 이 약을 복용할 경우 자궁이 심하게 운동을 하게 돼 임신 중에는 절대 복용이 금지된 약이다. 이를 역 이용하는 거였다. 입원해서의 약물 배출은 먹는 약 대신 좌약을 사용한다. 입원 직후 한번,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초음파를 보고 다시 한번 약을 넣었다. 이때부터도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이구나, 싶었다. 약을 넣는 것도 초음파를 연달아 보는 것도 사람을 힘에 부치게 했다. 하지만 그때까진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를 다음날 새벽 일찌감치 깨달았다.


좌약은 더 즉각적인 효과를 내기 때문에 밤 사이 나는 아기집과 태반을 배출해내리라 생각했다. 미리 혈관 진통제를 투약하며 기다린 상태였고, 희미하게 진통이 점점 진해지는 것 같아 진통제의 강도를 한 단계를 더 높였다. 이제 임의로 자극한 자궁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아기집과 태반 등을 배출해내기만 됐다.

이 과정에서 소변은 물론 대변을 따로 챙겨준 배출통에 받아 간호사에게 검사 맡아야 한다. 하아 소변까지야 그렇다 치고, 이 와중에 나는 대변을 보게 될까 봐 제대로 먹질 못하겠더라.


오전 5-6시 즈음 야속하게도 나는 잔잔히 잠들어 있었고, 반응 없는 나에게 마지막 처방으로 추가 주사가 투여됐다. 이 주사 들어가면 어지러우실 수 있어요, 라는 안내와 함께 주사를 맞은 후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 나는 거의 꼬꾸라질뻔했다. 공간이 뒤틀리듯 뱅글거렸고 속이 미칠 듯이 울렁거렸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먹은 게 없어 게워낼 게 없던 위장에도 나는 한참 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배출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나는 이 과정을 다 겪고 결국은 수술을 하게될가봐, 마음까지 너무너무 불편했다.


다시 초음파를 본 담당의가 시술을 해야 할 것 같으니 위층의 수술실로 가라고 전했다. 청천벽력 같았다. 결국 수술을 하는 건가. 좀 더 기다리면 안 되는 걸까. 이건 너무 억울한데. 주치의에게 다시 요청해볼 심산으로 수술실로 올라갔는데, 어시스턴트 닥터가 설명을 해줬다. 질 입구까지 거의 배출이 됐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이 경우 간단하게 집어 빼내는 시술을 하게 된다고 했다. 소파술과 다른 것인지,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파술은 수면마취를 해야 하지만 이 경우 간단한 시술이기 때문에 금방 끝난다고.

물론 간단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지막 가장 괴로운 시술 과정까지 끝나자 내 몸에 있던 일부가 정말 다 빠져나가 버렸다. 이제 남은 혈들이 한 달 정도에 거쳐 빠지게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퇴원을 했다.





2019.03에 작성한 글입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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