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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May 11. 2019

아기가 사라졌다 : 발리에서의 임신, 그리고 유산

발리 응급실과 입원의 기억 

발리 두달살기의 중간 지점을 넘어섰을 때, 나는 임신 사실을 알았다. 아기가 생긴 건 생각보다 우리 부부에게 큰 기쁨이었다. 사실 나는 아기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도, 그렇다고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였다. 막상 아기가 생긴 걸 확인하자 남편이 뛸 듯이 좋아했고, 나도 임신을 받아들이면서 아기를 만날 생각에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결국 그 아이는 세상에 진짜 온 존재는 아니었지만, (아기집만 생긴 자연유산 상태였다) 우리가 이제 아기와 함께 살아가봐도 좋겠구나, 이번 일로 스스로도 몰랐던 마음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


아기가 사라졌나봐,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 3-4일 남았을 때였다. 입덧으로 속이 좋지 않았고, 세상의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 나는 입맛도 변해버리고 한껏 예민한 몸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에 갈 날을 손에 꼽고 있었다. 테스트기만 해보고 병원 검진도 받지 않은 상태에, 먹는 것도 부실해 마음 한구석에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도 컸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내심 두려워 내내 숙소에 머물던 나는 한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큰 맘먹고 우붓 관광에 나섰다. 주수도 많이 넘어갔고, 그 정도 활동은 무리가 없겠지, 막연하게 안심하고 길을 나서서 한 시간 가량 차를 타고 몽키 포레스트로 갔다. 한 시간 정도 숲길을 걸으며 산책을 했다. 그곳의 원숭이들 때문에 몇 번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힘든 여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몽키 포레스트에 도착한 직후부터 배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다. 살짝 불편한 정도라 별 생각없이 참고 넘겼다. 원래 잘 아프고, 원래 잘 참아버리는 성격이라 별 생각없이 늘 해오던대로 하지 않았나, 나중에 생각해보면 참 미련했구나, 안타까웠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느낌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분비물이 많이 나오는 느낌에 조금 불안해진 나는 곧장 숙소로 차를 타고 갔는데, 도착 이후 본격적으로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어이없을 정도로, 임산부가 배가 아픈 걸 참으면서, 곧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는 게 이상하기까지 한데, 우린 막연하게 숙소로 돌아갈 시간만 기다렸다.

야심차게 엄청 정글 한 가운데 위치한 호텔을 예약한 터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무조건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정도로 넘겨버렸다. 손 쓸 방법이 없으니, 몸아 너가 좀 참아줘,하는 식의 평소 나의 몸에 벤 습관이 자연스럽게 발동했던거라 생각한다.


막연히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며 잠들었다 눈을 뜬 나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밤이 될수록 점점 통증은 강해졌다. 마치 출산이 임박하면 온다는 통증 간격처럼 일정 간격 휴면 상태를 거쳤다가 짧은 동안 강한 통증이 오곤 했다. 찌르는 듯한? 뒤틀리는 듯한? 아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냥 묵지하게 아랫배 정 중앙이 심하게 아파오는 고통 그 자체였다. 간신히 호텔에서 비상약으로 해열 진통제를 한알 받아 먹고, 밤을 보낸 나는 밤새 그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잠이 들 듯하면 통증이 와서 깨기를 반복하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는데, 아침이 돼서도 우리는 딱히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조차도 못했다.


그 사이 조금씩 출혈이 시작됐기 때문에 막연히, 아이가 사라지는거구나, 슬픔 반 아픔 반 속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유산이 되는건가보구나, 어찌해야 될지를 모르던 나는 언니에게 연락했다가 당장 병원에 가라는 얘기를 듣고서야 아, 병원에 가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인도네시아에도 병원이 있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왜 이곳에서 나는 병원에 못간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필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문 연 병원을 알아봐줬다. 그 와중에 발리 사람들은 우리를 돈으로만 보는 기분에 사로잡혀 더 암담했다. 처음 착하고 순진하게 보이던 발리 사람들은 두달살기를 마칠 때 쯤, 우리를 다들 돈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실체로 보였고(물론 소박하고 웃음 많은 사람들인건 사실이다), 어떤 친절에던지 그 댓가가 요구된다는 걸 느끼고 있던 터였다.

호텔에서 태워주는 이 리무진은 얼마를 내놓으라고 할지, 병원비는 바가지를 쓰는 건 아닐지, 그 걱정도 잠깐이었지, 나는 너무 아파서 거의 이성의 끈을 놓기 직전이었고, 어디서나 웅크리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호텔에서 내려준 첫 병원에는 산부인과 담당의가 없는데 괜찮겠느냐, 물었다. 다시 택시를 불러 병원에서 알려준 다른 병원으로 가야했다. 이제 살았구나, 했던 마음이 와르륵 무너졌다. 통증은 10분 쉬었다 1분 정도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을 줬다. 우붓은 정말 시골이었다. 꾸따나 짱구 지역이었다면 좀 더 큰 병원이 있었을텐데. 한참을 달려 응급실 같은 곳에 다다르자 나는 다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휠체어가 나를 향해 오는 모습이 보이자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응급실 침대에 누여져서도 의사를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했다. 그 사이 진통제를 요청해도 발리에선 단호했다. 아이가 잘못될지 모르니 혈관주사는 절대 안되고, 곧 약을 줄테니 기다리라고. 병원에 도착하고 다행히 커다란 패드를 깔아줬는데, 그 전과 비교도 안되게 출혈이 심했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피를 쏟아본 적이 없었다. 정체모를 덩어리까지 함께.

내 옆 자리에서는 한 여인이 한동안 끙끙 소리를 내더니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가 엄청나게 울렁차게 울었다. 건강한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갓 태어난 빨아간 아이를 안고 가는 게 보였다. 발리에서는 이렇게 아기를 낳는건가, 나는 어두룩한 조명,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오래 누워있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침대에서 출산할 수 있는 서울 집 근처에 가족 분만실을 이미 다 알아봐두었는데. 환한 불빛 아래 얇은 커텐 한장으로 가려진 응급실에서의 출산은 생각치도 못했다. 그래도 출산을 마친 옆 자리 여인이 부럽기만 했다. 적어도 그녀의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은 끝난거겠지.


간신히 도착한 의사는 영어가 서툴렀다. 간호사가 통역을 해줬는데, 그녀도 간단한 영어만 했다.

초음파 검사를 한 의사는 의외의 말을 했다. 아기가 있는데 아기집만 보인다고, 아기집이 2.5mm정도라고 아기가 위험해 보이니 임신을 유지시켜주는 호르몬 약과 진통제를 주겠노라고. 몇일 경과를 보고 산모가 위험할 경우 유산을 위한 수술을 해야할지 봐야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의아해졌다. 어리벙벙했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아이가 있다는 거지? 거의 백프로 유산을 확신했던 우리는 아이가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래도 조금 마음이 나아졌다.


전날 나는 통증의 휴식기를 틈타 당장 오늘 한국으로 가겠노라, 비행기 티켓을 끊어논 터였다. 헌데 의사는 내일이라도 비행기에 오르는 건 위험하다고 했다. 병원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 병원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데에 사인을 하고 가야한다 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흠.

수수료를 내고 티켓을 취소했다. 사실 나 역시 이 몸으로 공항까지 가는 것도 엄두가 안 났다. 입원을 했고, 그렇게 몇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 입원이라니,

진통제는 먹고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효과가 나왔고, 그제야 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실이 없다고, vvip 룸을 제안받았는데 하루 한화로 14만원 정도라고 해서 1인용 특실인 그 병실을 사용했다. 한국과 비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이었다. 샤워기가 있는 화장실과 세면대가 딸린 꽤 큰 방이었는데, 보호자 침대도 따로 있고, 환자 침대에는 '프리미엄'이라는 브랜드가 붙어 있었다. 얼핏 보기 꽤 호사스러운 방이 었지만, 지금 떠올린다면, 가벼운 결벽증이 있는 나같은 사람이 거기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통증이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화장실 상태는 우리나라 병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고, 몇일 있다가는 커다란 벌레의 등장으로 한바탕 소탕 작전을 거쳐야 했다. 병원에 바퀴벌레라니! 그래도 발리 사람들은 절대 뺀질뺀질거리지 않는다. 일단 무언가 해달라는 요구에는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든 요구를 다 들어준다. 벌레를 잡아달라니 청소 담당자가 왔고, 남편이 발견한 커다란 그 놈이 잡힐 때까지 총 세 마리를 검거해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아온 의사는 그날도 우리를 가지 못하게 붙잡았고, 더 이상의 처치나 조언은 없었다. 진찰 후 잠잠했던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내일은 한국에 갈 수 있는걸까. 실제 통증도 심했지만, 뭐 하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두려움도 공포스러웠다. 이 통증은 몇일 동안 이어지는 거지, 앞으로 출혈은 얼마나 더 있는건지, 이 출혈은 왜 일어나는 건지, 배는 대체 왜 계속 아픈건지, 진통제가 효과가 없는건지, 이유 모를 의문들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졌다.


다음날 출혈도 많이 줄었고, 정확한 간격으로 약을 먹으면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파악했다. 병원 밥은 더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미 예약되었던 티켓은 날아간 상태였다. 발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대한항공은 자정 즈음에만 있다. 환승을 하거나 다른 국적기의 항공은 탈 엄두가 안 났다. 아침에도 어찌될지 몰라 티켓팅을 안하고 기다리던 우리는 오후 느즈막히 떠나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바로 당일 티켓을 예매했다. 발리의 비자tourist visa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우리는 의사에게 소견서를 부탁해 밤 9시경 병원을 떠났다.


간호사들은 하루 세 번 혈압과 체온을 쟀고, 당직이 바뀔 때마다 병실을 찾아 인사를 하고 상태를 물었다. 침대에서 절대 내려오지 말고 화장실도 침대에서 볼 것을 당부했다. 그것말고 해준 건 없지만 그래도 마음 써주고 아프냐고 걱정해주는 마음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떠나는 날에도 휠체어에 나를 싣고 움직이지 말라고 택시 문 앞까지 옮겨 주더니 택시 기사에게도 뭐라 현지말로 당부를 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 갈 수 있는걸까,

공항까지 다시 한 시간 넘게 차로 이동했다. 처음 관심을 가져본 일이었지만, 각 공항마다는 아픈 이들을 위한 휠체어 서비스가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휠체어라니. 체크인 카운터에서 의사 소견서가 있느냐 물었다. 확인해보더니, 나의 진단서에는 의료 어시스턴트가 있어야 탑승이 가능하다고 체크가 되어있고, 이런 경우 자신들은 비행기에 나를 태울 수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도 첨부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항공사에서 병원에 다시 요청해 새 소견서를 받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집에 갈수 있는거겠지..그 밤에 다행히도 병원에서 새로 작성한 소견서가 도착했다. 다행히도. 이제 정말 집에 갈 수 있는거겠지.


항공사 직원은 공항 내부까지 휠체어에 앉은 나를 데려다줬다, 중간에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바로 게이트로 갈건지도 확인했다. 그녀를 겨우 안심시켜 보내고 간단히 식사를 하고 게이트에 누워있었는데, 탑승 시간이 되자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비행기 좌석으로 안내되고, 우리의 발리에서의 긴 여정이 드디어 끝이 났다.


비행기 좌석에 앉자 다시 이유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비행 중에는 통증이나 별다른 일없이 지나갔다. 새벽 비행인지라 실내는 대부분 어두운 상태였고, 착륙 전 아침식사로 간단하게 인스턴트지만 흰죽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2019.3.8에 작성한 글 입니다.

- 엄청 길어졌네요, 이후 이야기는 다음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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