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하며 보내는 하루하루
8월 1일부터 가게를 정식 오픈했다.
우연이고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게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 미묘하게 손님들이 오는 빈도가 차이가 났다.
정식 오픈을 하면 프리-오픈 시기보다 주인의 마음도 달라지게 돼있고,
그래서인지 손님도 더 많이 찾아 주는 것 같았다.
처음엔 다들 가오픈 기간을 왜 두는 것일까, 의아한 마음 반,
아직은 자신이 없기에 발 빼는 마음 반으로,
우리도 프리-오픈 기간을 두었다. 그런데 정식 오픈을 앞두고서는
가오픈 기간 동안 짧지만 알차게 많은 것들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오픈 이후에도 조금씩 재정비해나가는 것들이 계속 생겨나지만,
프리-오픈 기간에는 좀 더 부담을 내려놓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앞으로 계속 유지해 나갈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손님들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는 것 같았다.
프리-오픈 기간에는 하루에 손님이 한 팀도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찾아주는 손님이 생기면 어찌나 기쁘고 고맙기만 한지 몰랐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 적응이 빠르고,
하나가 채워지면 자연스레 하나를 더 바라는 욕심이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한 달이 넘어가고 두 달이 지나면서
손님들이 우리의 규칙대로 점잖게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눈에 미운 손님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엔 와주기만 하면 고맙던 사람들이
이젠 내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내가 바라는 대로 있어주지 않으면
와도 달갑지 않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생기는 거다!
말로만 듣던 상식 밖의 사람들은 늘 예상을 벗어나 들이닥쳤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가게에 방어벽을 하나 더 세우기 위한 계획 착수에 들어갔다.
주인의 공간까지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석구석 공간을 살피고 가는 손님 덕에 우리는 확실한 공간 구분을 할 수 있도록 공간 구성을 재정비했다.
어제는 여자 친구들이 웃음꽃을 피우던 테이블에 갑자기 한 친구의 어머니가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생들이었던 모양인데, 엄마를 본 아이들의 얼굴이 굳어 버리더니, 더 이상 웃질 않았다.
화가 난 듯한 어머니는 "내가 이럴 줄 알고 쫓아다니는 것"이라고 소리를 치시더니
음료 주문은 하지 않고 별도의 좌석에 홀로 앉아 어두운 기운을 뿜어 내셨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일엔 대응 매뉴얼이 없다.
그들이 돌아간 후에 나는 고등학생의 출입을 금해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만나면 기분 좋고, 와주면 고마운 이들이 사실 더 많다.
주인을 배려하고 즐겁게 공간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얼마나 뿌듯하고 기쁜지 모른다.
상식 밖의 사람들은 열의 하나, 정말 가끔이다.
그 소수의 사람을 방어하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마련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오늘은 원래 정기 휴무일이었다.
지난주 문을 열어야 하는 날였지만 가족 행사로 임시 휴무일을 가졌던 우리는
그를 대신해 오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표정이 좋지 않은 손님이 한 분 들어왔다.
주문을 하고 통화를 하는 소리가 언뜻 귀에 들려왔는데,
아침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문득 더 맛있게 커피를 만들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기분이 그런 날, 나한테 커피 한잔을 사주면서 위로받는 날.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달콤한 크림이 얹어진 커피를 만들어 주면 좋겠는 날.
얼마 전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빅 매직> 중 아래 내용을 읽고
스스로를 돕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누군가 나에게 자기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목적으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
나는 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도와주겠다고 하지 말라."
(중략)
"나는 당신이 나를 돕기 위해서보다는 당신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쓰는 게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혹은 당신이 보다 어둡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나는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거나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거대한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예술 창작을 했으면 좋겠다."
한때 나도 누군가를 돕기 위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받았듯이' 나도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로하는 내 방식이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알았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나이지만,
상대는 나에게 꼭 위로를 건넨 것이 아닐 수도 있단 것도 알았다.
모든 주체는 나이다.
누구라도 '전적으로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누군가의 도움이라면 나는 몹시 부담스러울 것만 같다.
오늘 첫 손님에게 건넨 커피는 내가 그에게 준 위로가 아니었다.
커피 한잔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꼭 내가 의도한 상대가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이 곳에 와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일을 하고 있다니, 멋진 것 같이 느껴졌다.
그건 내가 받은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