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뜻 없이 한말

by 지금


“어렵게 자라서 항상 궁핍했을 텐데 우리 자금팀에 오면 돈욕심나지 않겠어요? “

스물네 살 때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에게 들었던 말이다.

내가 어렵게 자랐다는 말은 자기소개서 어디에도 없었는데 등본상 가족 관계 사항을 유심히 보더니 폭풍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이 한쪽만 계신 이유가 뭐냐, 할머니가 키워주셨냐, 용돈은 받아봤냐, 가난하게 컸냐, 돈욕심 나서 자금 관리를 잘할 수 있겠냐 등등 그런 질문들을 받는 내내 나는 모멸감에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업무를 위해 취득한 많은 자격증, 이전 직장에서의 회계관리 경력 등이 이력서에 기재되어 있었지만 그런 건 면접관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압박면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눈빛과 날카로운 말투가 이미 나를 탐탁지 않게 여김을 말해주는 듯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배꼽아래 얌전히 포개져 있던 두 손이 이미 땀으로 범벅됐다.


“궁핍함 때문에 제 것이 아닌 것을 탐해본 적은 없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바르게 생활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고 업무능력으로 신뢰를 드릴 자신도 있습니다. “


무슨 정신으로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대답과 동시에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면접이 끝난 후엔 분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화장실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었다. 흘려듣지 못하고 기어코 또 가슴에 상처로 새기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합격 통보 문자를 받았지만 구태여 그곳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덜 고팠던 건지 내 선택에 온 가족 생계가 달려있는데도 그땐 알량한 자존심 그거 하나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출근을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히자 면접자리에 함께 있던 여자 팀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면접 자리에서의 부장님 말 때문이라면 자신이 대신 사과를 하고 싶다며 나를 설득했다. 별 뜻은 없이 하신 말일 거라고 했지만 이미 별뜻으로 받아들여 가슴에 구멍이 난 뒤였다. 차라리 그냥 떨어트리지 왜 붙여서는 미안함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별 뜻 없이.

언제쯤 나는 별 뜻 없이 툭 던진 말들에 상처 입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십여 년이 흘러도 그때 그 말은 여전히 내게 상처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가끔 ‘별 뜻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라며 자신의 말에 상처 입은 사람을 되려 나무라곤 한다. 말이 지닌 무게에는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너무나 쉽게. 나는 그럴 때마다 별거 아닌 걸로 상처 입는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만 더 헤아리면 될 일인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서 우리는 또 상처 주고 상처 입으며 살아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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