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23일

by 은은


乾塊化碧畦(건괴화벽휴) 마른 흙덩이가 푸른 밭두둑으로 변했으니

費盡幾牛力(비진기우력) 몇 마리의 소가 힘을 다한 것인가

針芒到黃穗(침망도황혜) 바늘 같던 싹이 누런 이삭 될 때까지

勞却萬人役(노각만인역) 수많은 사람들 힘써 일했네

幸免水旱災(행면수한재) 요행히 가뭄과 홍수를 면해야

萬一儻收得(만일당수득) 만에 하나 제대로 수확하겠지

見兹稼穡艱(견자가색난) 이렇듯 농사일이 어려우니

一粒何忍食(일립하인식) 쌀 한 톨인들 어찌 함부로 먹으랴

凡以祿代耕(범인녹대경) 농사짓는 대신 국록을 먹는 사람들아

要當勖乃職(요당욱내직) 마땅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지라

- 이규보, <동문 밖에서 모내기를 보면서[동문외관가(東門外觀稼)]>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저자이기도 한 고려 중기의 문장가이자 시인입니다. 고구려의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을 지은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먹거리와 자연, 시골 풍경, 소, 곤충, 동물, 식물 등 자연과 생명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짓기도 한 자연주의자이자 생태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앞선 글에서는 텃밭의 여섯 작물(오이,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의 생장 과정과 먹거리로서의 쓰임과 효용, 생김새를 노래하였다면 이 시에서는 임금님도 부처님도 굶주린 사람을 살리기 어려운데 비바람, 가뭄과 홍수를 겪어내고 ‘바늘 같던 싹이 누런 이삭 될 때까지’ 밤잠 설치며 곡식을 생산하는 농부와 땅, 소, 자연의 수고함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른 흙덩이’를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푸른 밭두둑’으로 바꿔내는 기적, 그 땀과 정성과 눈물은 아무나 하기에 어려운 일이며 함부로 지어서도 안 되는 바로 ‘농부의 일’입니다.


옛날에는 가뭄으로 인해 농사지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면 오늘날에는 편리함이라는 물신(物神)을 추구한 결과,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 산불, 홍수, 태풍, 이상기온, 땅과 강, 바다의 오염 등으로 인해 농산어촌 모두 먹거리를 길러내고 품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81장을 ‘농사’를 주제로 다시 풀어 쓴 파멜라 메츠는 <자연의 힘>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도와 더불어 논밭에서 일함은

자연의 힘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마음 모으기를 배우는 것은

날씨를 지켜보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농부는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기다린다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자연의 힘을 지배하려 애쓰는 것은

도와 더불어 일하는 자세가 아니다

농부는 이를 알기에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기에

언제나 자유롭다

자연이 주는 힘으로 일을 하기에

그의 논밭은

도와 조화를 이룬다(농사의 도 중에서)


기계의 힘을 빌리고 계속 의지하게 되면 기회를 틈타 움직이는 마음, 기교를 부리는 마음인 기심(機心)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노자는 농부는 자연의 도에 따라 마음을 모으고 험상 궃은 날, 햇볕 강한 날, 흐린 날, 비가 많이 오는 날, 바람 많이 부는 날에 따라 움직이며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순응하며 받아들일 줄 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잔꾀인 기심을 이용해 한낱 지구 구성원의 극히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마귀가 수레를 이겨보려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일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연이 주는 힘으로 일을 하며 천지 만물을 자연과 함께 생육하게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농부이기에 논밭과 자신을 의심하는 일 없이 천지의 이치에 따라 자유롭게 오늘의 일에 충만함을 느끼고 그때그때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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