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

28일

by 은은


銀絲生滿腹(은사생만복) 은빛 실이 뱃속 가득 나와서

簷隙掛橫斜(첨극괘횡사) 처마 틈에 비스듬히 줄을 친다

帶雨飜蛛網(대우번주망) 빗방울 젖어 거미그물 뒤집히고

因風拂綺羅(인풍불기라) 바람결에 비단 장막 흔들리누나

螢罹星欲動(형리성욕동) 반딧불 걸리니 별이 움직이는 듯

金碎月穿華(금쇄월천화) 금빛 부서짐은 달빛이 비쳐든 것

爲報探花蝶(위보탐화접) 이르노니 꽃을 찾는 나비들아

飛飛恐見遮(비비공견차) 날아다니다 걸릴까 걱정일세

- 이응희(李應禧, 1579~1651), <거미줄[蛛網(주망)]>


옥담(玉潭) 이응희는 조선 중기의 시인입니다. 그는 성종 대왕의 삼남인 안양군(安陽君)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입니다. 광해군 때 대과 초시에 응시하였으나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실정(失政)을 보고서 벼슬길을 접고 고향인 경기도 산본(당시에는 과천시, 현 군포시) 산내곡(山內谷), 수리산 아래에서 시 짓기와 글공부, 농사를 지으며 한평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옥담시집(玉潭詩集)》이 있습니다.(yes24 작가정보 참조.) 서울대 국문과 교수인 이종묵은 17세기 향촌 생활이 오롯이 담긴 빼어난 풍속시이자 삼라만상을 모두 다룬〈만물편(萬物篇)〉과 〈영조(詠鳥)〉는 그 중 압권이라는 한시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응희는 자신이 뿌 내린 향촌 사회의 사족(士族:선비 집안)이자 처사(處士:벼슬하지 않는 선비)로서 농(農과) 우주 만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깊이 가지고 1천여 수의 시를 남긴 생태 시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엊그제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하며 많은 비를 쏟아부었습니다. 제방 유실과 주택 침수, 하천 범람 등으로 인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건 사람뿐만이 아니겠지요. 모든 지구 생명공동체의 빠른 회복과 복구를 기원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숙소 정리를 위해 제 방을 들렀습니다. 평소 베란다 난간 및 천정에는 거미들이 서식하고 있어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름밤 제 방의 불빛을 보고 엄청난 수의 하루살이들과 나방들이 제 방에 들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이를 제지하는 데 거미가 한몫(?)을 하기도 합니다. 베란다 바닥에는 거미알, 쥐며느리, 각종 나방, 하루살이의 사체가 즐비해서 수시로 쓸어 정리하기도 합니다.


전날 태풍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거미는 태풍 전과 같은 모습으로 거미줄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노자의 삶의 철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생명력과 경이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숙소는 신관입니다. 출근을 위해 신관 옆 본관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향나무와 골드크레스트 윌마가 길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거미의 생명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향나무의 가지와 가지 사이와 윌마 머리의 높고 낮음의 고도차를 이용해 가림막 같은 거미줄을 펼쳐 놓고 있음을 보면서 자연의 지혜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었고 인간의 지혜란 것이 우주 대자연의 지혜에 비하면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응희가 거미줄을 바라보는 시선, 섬세한 묘사, 사물과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바로 생태적 삶을 위한 기초이자 시작이며 지구 생명공동체에 대한 배려이자 친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성스럽다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절성기지(絶聖棄智)]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내는[무위이위(無爲而爲)] 대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오늘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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