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를 하면 갑자기 인생이 평화로워지고 선해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물론 굳은 결심을 하고 담배를 끊듯이 마음을 바꿔먹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습관의 힘에 끌려간다. 몸과 마음에 곰삭을 대로 삭은 습관과 지난하게 밀고 당기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당신의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이라는 감각 기관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일 때마다 반복해 온 마음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 반응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의 두뇌 신경과 몸 신경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사실상 습관 덩어리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습관 덩어리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명상이다. 세계적 명상학자 존 카밧진은 이 객관적 관찰을 탈 자동화라고 표현한다. 사람의 몸과 마음의 행위는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데 그런 당신의 몸과 마음을 제삼자적 시점으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명상’이다.
그런데 자신을 제삼자적 관점으로 보면 불량했던 사람이 선량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친절한 이성을 보면 강력한 호감을 표현한 것인 양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생각이나 감정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을 제삼자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런 습관이 그칠까? 알 수 없다. 단 한 번의 자기 관찰로 인해 그런 반전은 지극히 드물지 않겠는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자신의 감정’을 한번 객관적으로 주시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가 만약 정상적으로 자기 관찰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말할까?
내가 또 제멋대로 해석하는구나. 이 순간이 바로 그가 제삼자적 관점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습관을 한번 알아차린 것이다.
당신은 하루 종일 뭔가를 판단하고 해석한다. 그 판단과 해석의 근거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의식에 저장해 온 기억이라는 마음 작용 때문이다. 기억은 물론, 어제의 경험도 기억이고 수십 년 전, 심지어 당신이 선명히 기억할 수 없는 불확실한 그것도 기억이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되비쳐주는 반사 거울과 같다. 당신의 판단과 해석은 기억이라는 거울을 치고 올라오면서 꺾이거나 변형된 마음의 움직임이다.
지금 드러내는 당신의 생각, 감정 반응은 어쩌면 기억의 장난일 수도 있다. 과일을 먹으면서 ‘달다, 쓰다’라고 언어화하는 것도 이미 ‘기억된 언어’로 ‘기억된 느낌’을 표현한 셈이다. ‘길다, 짧다’도 그 기준은 기억 속에 있다. 그런 기억이 없는 어린아이는 ‘길다, 짧다’라는 표현이나 개념 자체가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런 나를 그렇게 객관화하는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 있다.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내용을 적어보는 것이다.
마음 : 머리가 딩딩 거려 죽겠어.
철수 : 왜 딩딩 거려?
마음 : 글쎄,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 갑자기.
철수 : 점심? 누구랑 먹었는데?
마음 : 이 과장 님하고, 김 팀장…. 이렇게 동태찌개 먹었지.
철수 : 점심하면서 얘기도 나눴겠네?
생각으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은 말이 쉽지 실천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시나리오 형식으로 적어가는 일은, 생각이 어렵지 실천은 쉽다. 적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집중력을 이끌어낸다. 뭔가를 적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일시에 동원하는, 차원이 다른 집중 행위다. 생각이 모기라면 글쓰기는 독수리 급이다. 그래서 글쓰기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과 그것을 시나리오로 작성하는 사람. 잘 보자. ‘등장인물 두 사람’과 ‘적는 이’의 위치는 같은가 다른가. ‘적는 이’는 그야말로 탈 동일시 돼 있지 않은가. 시쳇말로, 노는 물이 다른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누구를? 나 자신을! 당신의 삶은 이런 순간에 입체적 차원을 회복한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