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상쾌한 적막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처럼
명상은 상쾌한 적막이다
결혼한 아들이 신혼여행을 떠난 다음날 아침, 녀석이 지내던 방 침대에 걸터앉았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침대와 책상 하나만 단출하게 남아 있는 그 방을 둘러보며, ‘한 동안 비어 있겠군’ 중얼거렸다. 내가 뱉은 한 마디가 방 안을 떠도는 듯했다. 너도 인마, 결혼이란 걸 해봐야 부모 맛을 알지. 이런 말도 그 빈 방을 떠돌았다. 이 녀석이 정말 출가한 건 맞을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한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졸음과 각성의 중간 지점이 있다면 그런 상태였으리라. 무슨 허방다리 같은 것에 빠진 듯도 하고 몸이 허공에 살짝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몸이 이완되고 물귀신 같은 침대의 유혹에 빠져, 누웠다. 옆구리와 한쪽 뺨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잠인지 아닌지 모를 적막감이 풍선을 채운 바람처럼 내 몸속에서 피부 전체를 팽팽하게 밀어내는 듯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명상’ 상태는 이런 것이다. 몸속에 혼곤한 잠이 차오르는 건지 다른 의식이 배어든 것인지 구분되지 않은 순간이 있다. 아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비스듬히 잠결 속으로 미끄러져가는 그 중간 어근 저리에 ‘몸의 명상’ 상태가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도 잦아들고, 씻을 것들 씻어 내린 좌변기의 물처럼 맑은 적막감이 찰랑대는 상태 속에서 나는 ‘명상’이라는 형태를 지켜보는 듯했다.
며칠 전 아침 명상 중에 모기 한 마리가 귓전을 윙윙댔다. 사람 피맛을 즐기는 진짜 모기가 아니라 ‘늙어가는 내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라는 모기였다. 나는 윙윙대는 그 생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까짓 거, 그렇게나 청순했던 오드리 헵번도 쭈그랑 탱이 할머니가 되던데 뭘’ 하는 생각도 날아올랐고, ‘나도 별 수 없구나. 젊은 여자애들이나 훔쳐보는 남자 노인네가 돼가는 거지 뭐!’ 하는 생각도 잠결을 시끄럽게 했다.
그날 아침 명상 중 떠오른 ‘나의 늙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아들의 빈방이 나에게 내민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내면의 모기는 어지간한 수행력으로는 잘 죽지 않는다. 내면의 모기가 보유한 필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수백 마리로 나누는 분신술을 쓰기도 하고 독수리처럼 변신하는 화신 술을 쓰기도 한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것이 모두 내 마음의 조화라는 사실을.
그래서 해답을 얻었냐고? 이 말은 밥 먹었는데 왜 살 안 쪄?라는 물음과 유사하다. 인생이 그런 산수인가. 경전 <숫타니파타>에는 인구에 회자하는 경구가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 흙탕에 젖지 않은 연꽃처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이 경구에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결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의 기미조차 없다. 주인이 떠난 빈 방에 앉아서 ‘적막’을 누리는 것이 과정이고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