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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우리는 거의 모든 순간
두 개의 현실을 산다

       

당신의 다섯 감각 기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눈, 귀, 코, 혀, 피부, 말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외부 대상을 향해 열려 있다. 눈은 외부의 모양이나 색깔을 보고, 귀는 소리를 알고, 코는 냄새를 안다. 혀는 음식 맛을 알고 피부는 접촉해 오는 감각을 안다. 이들 다섯 감각 기관이 몸 바깥으로 열려 있다는 의미는 그만큼 외부 대상에 대한 반응 민감도가 높음을 뜻한다. 그러다 보니, 당신이 간과하거나 아예 없는 것 취급하는 것이 생기게 된다. 바로 마음이다.   


사장실에 다녀온 이 부장이 잡쳤다는 표정 반, 결기에 찬 표정 반을 섞어서 말했다. “이거  오늘 밤새서라도 내일 아침까지 마칩시다. 한 달치 야근 다 쓴 사람은 다음 달치 당겨서라도 마무리하자고!” 당신은 마침 이마가 딩딩거려서 벌써 몇 차례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퇴근하면 회사 앞 사우나탕에서 몸부터 담그고 볼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날밤?    

  

이때 당신에게는 틀림없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한쪽은 마음이라는 ‘내 안의 현실’이다. 분노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이 솟구친다. 하지만 ‘내 밖의 현실’은 ‘내 안의 현실’ 쯤은 가볍게 묵살한다. “아, 네. 언제든 마쳐야 할 일인데,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대답하는 자신을 향해 속엣말 한마디 보탰을지도 모른다. ‘언제든 마칠 일 좋아하네! 너 꼭 그렇게 살아야겠냐?’      

  

오늘 하루만 놓고 봐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서는데 소비자 문의 전화가 뒷덜미를 잡아챈다. 점심 후 보던 책 잠시 보려는데 후배 직원이 살살거리면서 말을 걸어온다. 기안 작성하려고 복잡한 자료들 뒤적이는데 부장이 ‘잠시 회의 좀 하자’고 불러 모은다. 어쩌다 시간이 나서 모니터에 주가동향 그래프 좀 열었는데, 부서 순시라고는 일 년에 고작 두어 차례 들르던 사장님이 떡 하니 의자 뒤에 서 있지를 않나.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돌아간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나이다. 그런데도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 앞에서는, 늘 새로운 벌레를 씹는 기분이 든다. 잘 돌아보면 이런 날이 한두 번이었던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돼왔다. 학교에서 돌아와 텔레비전 좀 볼라치면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가 ‘숙제하고 봐’라면서 뉴스 채널로 돌린다. 결혼해서는 회사 핑계 대고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려는데 아내가 친구들 부부 모임 날짜 잡혔다고 통보해 온다.      


이 두 가지 현실은 항상 결렬되고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내 안의 현실과 내 밖의 현실이 동시에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실 소파에 멍하니 누워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이럴 때 누가 홑이불이라도 덮어주면 좋겠네,라고 생각하는데 딸이 홑이불 한 장을 말없이 덮어준다. 유난히 운동 한 게임하고 싶은 날인데 워낙 부킹이 안 잡히는 시절이어서 언강생심 내 팔자에, 하면서 마음 비우려는 순간 친구 전화가 온다. “어이, 이번 주 일요일 어때?”

     

두 개의 현실이 일치하는 느낌, 기억하는가. 우리는 이럴 때 몸의 이완을 느끼고, 행복감을 경험한다. 그야말로 내외가 통합된 순간이다.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환경,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조건, 인정받고 싶을 때 인정받는 일… 당신은 이렇게 내 마음과 외부 조건이 일치하는 세상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이 왜 그렇게도 아득한가.

     

아득하다. 내 마음대로 먹고, 자고, 놀았던 기억이 아득하다 보니, 세월이 가면서 그 ‘마음’을 잊고 말았다. 어차피 내 인생에 그런 유토피아는 없다고 나도 모르게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변덕스럽고 무성했던 내 꿈, 소망, 야망, 희망 따위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점에서, 인류를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한 자’라고 논파한 헤겔의 한 마디는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삶의 뿌리를 잊은 채 ‘돈, 명예, 사랑’에 끌려다녔을지도 모른다. 바다 밖에서 바닷속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마음의 힘을 회복해 줄 방법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오면서 ‘돈, 명예, 사랑’을 좇아 정신없이 내달렸음을 흔쾌히 인정한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일상 속에서 가끔 자신에게 되묻기! 이게 무슨 마음이지? 손을 뻗으면서, 물어보라. 무슨 마음으로 손을 뻗지? 반드시 당신의 마음은 답할 것이다. ‘수저 잡으려고.’ 혹은 ‘팔이 뻐근해서’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 질문 하나로 당신은 자신의 마음 안 쪽으로 쓱, 들어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금 무슨 마음이지?’이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음의 영토를 한 뼘씩 되찾아가는 일이다. 물론, 그런 심리적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온 마음의 관성이 쉽게 그런 질문을 용인하지 않는다. 애써 의도적으로 해보는 수밖에 없다. ‘지금 무슨 마음이지?’ 너무 단순해서 ‘이게 효과 있을까’ 싶기도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단순한 질문이 당신에게 삶의 휴식 공간을 선물한다는 점이다. 마음의 예쁜 공원 같은 것, 말이다.


본의 아니게 나의 주체성, 정체성, 존재감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마음’ 혹은 ‘의도’ 따위를 잡아놓은 물고기 취급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느 쪽에 치우쳐 살아왔는가. 내 마음을 챙기면서 살아온 정도가 30퍼센트 정도는 될까? 그렇다면 ‘돈, 명예, 사랑’을 향해서는, 70 퍼센트? 만약 그런 수치가 나온다면, 이것은 삶의 심리적 기울기가 7 : 3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삶은 평안했을까. 가만히 두면, 이 불균형이 저절로 바뀔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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