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력은 세상살이의 경쟁 품목이 됐다. 공감과 유사한 의미로 동정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감은 동정심과 다른 문제다. 동정심은 타인의 곤경이 저절로 이해되는 마음의 행위다. 어린아이에게도 동정심이 발현되는 이유다. 《공감하는 능력》을 쓴 로먼 크르즈나익은 ‘공감은 상대의 감정이나 시각을 이해하여 그것을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활용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기술’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복⋅숙달이 필요하다.
이런 날이 있다. 당신은 엊그제 당구 숙적과의 게임에서 이긴 순간을 떠올리면서 혼자서 씨익 웃는다. 때마침 결재판을 든 직원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든 당신과 직원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 순간 직원 표정이 잘못된 애정 행각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굳어지면서 엉거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웃음기를 지우면서 얼버무리듯 말했다. “아, 박 팀장, 무슨?” “아, 네. 부장님. 결재 받을 게 있어서…” 이 짧은 순간의 한 컷이 삼 개월 후 직원 평점에 영향을 미치리라곤 두 사람 모두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약, 상황이 이와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당신이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는데 결재판을 든 허 팀장이 다가와서 웃고 있는 당신 모습을 보자 본인도 씨익 웃으며 말한다. “부장님, 좋은 일 있으시나 봅니다!”
공감이란 뭘까. 상대의 간지러운 등판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아무리 민감한 손으로 만져봐도 ‘간지러움’이라는 몸 감각을 만질 수는 없다. 하지만 몸의 간지러움으로 인해 파생하는 정신적 역동을 느낄 수는 있다. 이 ‘정신적 역동’은 간지러움이라는 감각처럼 살갗을 긁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름처럼 떠다니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서 만나는 어느 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당신은 그것을 느낄 뿐이다. 상대와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된 순간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정신적⋅육체적 태도다. 여기에서 핵심은 ‘적극적인 반응’이다.
세상은 타인 감성 난독자의 생존지를 빠르게 빼앗아가고 있다. 반면에 높은 감성지능은 비중과 너비를 대폭 확장한다. 왜? 당신의 직설적인 욕구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나 감성을 읽지 못하는 상품이나 태도를 거들떠나 보는가. 커피를 손쉽게 타 먹고 싶은 ‘감정을 이해하고 그 욕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 믹스 커피다. 강한 직사광선에 그을리기 싫은 피부를 지키면서 그것을 더 윤택하게 하는 데 공감한 것이 썬 크림이다.
당신이 사용중인 물건을 보면 ‘공감력’이 얼마나 강한 생존의지를 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공감력은 원시 사회로 치면 창이나 활과 같고, 전쟁터로 치면 권총이나 소총과 같다. 공감은 올바른 자세와 반복적인 훈련을 바탕으로 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한 내면의 상품이기도 하다.
당신은 이쯤에서 두리번거릴지 모르겠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는 게 공감력을 높이는 길이지? 듣고보니 정말 중요하긴 한데, 말이지.
공감의 힘을 강화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용이다. 특히 자신에게 부정적인 기억이나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공감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스티븐 헤이스와 스펜서 스미스는 저서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에서 ‘기꺼이 경험하려 하지 않으면, 경험하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생각에 대해 외면하거나 잊기 위해 노력할수록 오히려 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다. 수용은 그 방식의 뒤집기이다. 그 부정성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다.
수용은 자기 공감이다. 내면에서 역동하는 부정성과 고통의 수용은 그것을 제3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바로 이와 같은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힘이 전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 스스로 공감함으로써 그 역동의 에너지가 타인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