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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내가 내 몸의 명칭을 불러줄 때

그가 나에게 다정다감한 눈빛과 함께 이름을 불러준다면 무슨 사건으로 기억될까. ‘인정과 수용’을 받은 자의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우리를 건성으로 훑어보고 교실을 나가는 것과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주면서 그윽한 시선을 보내주는 것과의 차이와도 같다. 미소 띤 선생님과 눈빛을 교환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차이가 왜 없을까. 김춘수 님의 시 ‘꽃’은 그 차이와 의미를 건네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 마음으로 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가볍게 눈을 감고 의식의 눈을 자신에게 맞춰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몸속 장기들을 직접 본 적 없으니, 몸속 장기에게 마음의 시선을 맞추는 일은 조금 막연할 수 있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늘 살펴왔던 피부 감각을 만나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마음으로 손바닥, 하고 부른다면, 당신의 의식은 곧 손바닥으로 직행한다. 발바닥, 하면 의식은 곧 발바닥으로 향하고, 발바닥의 다양한 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뭔가 찌르는 듯한 감각, 간지러운 감각 따위가 알아지지 않을까. 이와 같은 연습이 거듭되면 몸속 장기들과도 의식의 눈을 맞추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된다.     

 

내가 위장아!라고 불러주었을 때 위장의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위장이라고 생각이 되는 지점에 나의 의식을 고요히 겨냥하면 당신은 이내 꾸르륵거리는 감각이나 쓰린 듯한 감각 따위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심장아!라고 부르면서 의식의 초점을 심장에 맞추면 위장 같지는 않지만 뭔가 반응하는 기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으로나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간장은 ‘아, 내가 간장이지.’ 하는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심장아, 하고 불렀을 때 심장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따뜻한 눈빛을 받은 셈이다.         

사랑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부터 시작한다. 시끌벅적한 시공간에서 부르는 것보다는 고즈넉한 공간이라면 한층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데는 시간이 많이 들거나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의 담임이셨던 방상은 선생님은 아침 출석을 부를 때 노래하듯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학생들의 이름에 리듬을 불러 넣으신 것이다. 성길이가, 김수우창, 박하 아아아···. 학기 초,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집중했다. 오늘은 선생님이 어떤 리듬으로 내 이름을 부르실까. 선생님은 거의 날마다 예측불허의 리듬으로 출석을 부르셨으니까. 그 덕분에 우리 교실은 늘 생생한 기대감이 소리 없이 울렁거렸다. 나만 그런 생각이었을까.


내 몸의 부위와 장기는 내 인생의 아름다운 꽃이다. 날마다 주인의 손길을 느끼는 정원의 꽃과 무관심하게 방치돼 있는 꽃, 그 둘 중 한 가지다. 아마도 이 꽃들 또한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결정적 요소로써 존재감을 늘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꽃은 누군가 눈을 맞추고, 코를 들이대고, 뺨을 대고, 피어나는 꽃의 소리조차도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진짜 꽃’이 된다. 내 몸 또한 마찬가지다. 주인인 내가 마음의 카메라를 들고 붉은 심장 앞으로 가서 ‘한 컷’ 해주었을 때 심장은 진짜 나의 심장이 되어준다. 내 몸의 모든 독성을 걸러주느라 주야로 바쁜 간장의 이름을 불러주며 마음의 카메라로 한 컷 찍어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소통의 시작이 이와 같은 능동적 경청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통은 상대가 누구이건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면서 시작한다. 

      

소통은 연습이고 훈련이다. 내 몸과 소통하는 습관이 들었을 때 다른 이들과도 더 멋지게  열리는 소통 근육이 발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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