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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이렇게 질문하면 인생이 가벼워진다

나는 가끔 내 이름 앞뒤에 따라붙는 ‘호칭’ ‘수식어’ 따위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의 아빠,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 무엇하는 사람. 나라는 존재의 의식 세계 깊은 곳에 덕지덕지, 흘러간 옛 영화 포스터처럼 붙어 있는 이것들을 벗어던지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자유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을까. 나를 에워싼 수많은 가면들. 장수의 갑옷과 투구처럼 내 영혼의 맨몸을 겹겹이 에워싼 세상의 호칭들, 스스로 ‘나는 누구’라고 지칭하며 버티는 나의 정체성. 이런 껍데기를 훌훌 벗어던질 방법은 없을까.    

  

“자유다”라고 외칠만한 경험은 아니지만, 나의 의식을 고요히 한 다음, 나라는 존재를 수식하는 여러 호칭을 하나하나 떼어내 본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아빠로서 영원한가. 누구의 삼촌으로써 영원한가. 회사 과장으로서 영원한가. 나에게 그는 영원한가. 어제의 불쾌한 기억은 영원한가. 지금의 근심은 영원한가.   

  

종이 한 장으로 뺨을 살짝 베인 적이 있다. 실금 같은 피가 살짝 비치고 만 정도였다. 심심할 때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습관이 신경 쓰이긴 했으나, 설마 하면서 실금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며칠이 지나 그 부위가 간지러워질 정도가 되자 이번에는 심심풀이로 우둘투둘거리는 딱쟁이를 뜯어냈다. 딱쟁이가 뜯길 때마다 간지러움 속에서 짜릿한 쾌감 같은 게 스치곤 했다. 그렇게 해서 탈이 났다. 2주 후, 병원에서 나는 피부 깊은 곳에 뿌리내린 염증을 메스로 째고 짜냈다.      

   

이렇게 무지몽매한 사건이 한 번이었을까. 어쩌면 당신 또한 사소한 흥밋거리, 미세한 쾌감, 스치는 바람, 쥐똥만 한 불쾌감 따위도 붙들고 매만지고 긁고 뜯어낸다. 집착의 전형적인 시초가 이런 모습이다. 그야말로 그 시작은 미미했으니, 이런 식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당신의 의식은 여러 종류의 가면을 쓰고 벗는다. 얼음 같은 상처와 햇살 같은 행운이 교차하면서 당신의 호칭들은 다양해진다. 당신은 낮 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지 못하고 잠들기도 한다. 잠자리에서도 전화가 와서 ‘과장님!’하고 부르면 당신은 ‘아, 네!’하고 답한다. 잠자리에서도 순식간에 ‘과장’이라는 가면을 다시 뒤집어쓴다.     

    

낮에는 택시 기사로 일한 후 저녁에는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인터넷 옷가게를 하는 사람도 봤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교사, 쇼핑 몰을 할 때는 사업가인 셈이다. 마이크로 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에게는 마이크로 소프트 기술고문이라는 직함 외에도 자선사업가, 최고 부자 등 그를 가리키는 10여 개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신기한 현상은, 호칭에 따라 나의 의식과 언행이 순식간에 전환된다. ‘여보게 김서방’ 하고, 장모님이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빛보다 빠르게 세상의 모든 사위가 취할 법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런 태도나 말투는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을까. 스스로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만약 그 순간, 내 아이가 ‘아빠’하고 부른다면 나라는 존재는 빛보다 빠르게 전환된다. 아마 아이를 보는 표정과 태도, 눈빛을 준비해 놓았다가 즉각 꺼내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당신은 경험하면서 반응하고, 반응하면서 경험한다. 수건이 물에 젖어있는 상태가 경험이라면, 그 경험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물을 줄줄 흘리거나, 물 머금은 수건이 햇빛에 기화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수건이라는 물질의 속성 때문이다. 나 같은 생명 또한 하루 중에서 많은 경우 그와 같은 물질적, 무생물적 반응체로 둔갑한다. 어떤 상황이나 현상을 경험하는 나와 그 경험에 반응하는 나라는 단순 조합만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 반응을 주도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의 기억’이다. ‘기억 없는 기억’이 내 심신을 주도할 수도 있다니.      


심리학에서는 ‘기억 없는 기억’중 상당 부분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무의식적 반응’은 생명의 주도성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순간적이나마 무생물적 반응이다. ‘툭치면 톡’하고 떨어지는 마른 가지를 연상시킨다. 이런 무의식적 반응을 화석처럼 고착화시킨 것이 어쩌면 당신의 이름 앞뒤에 따라다니는 사회적 명칭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물에 적셔진 수건처럼 인생 전반을 적시고 있는 것 같은 호칭들에서 벗어나 ‘나의 유아기 의식’이나 ‘유아기 전 의식’을 만나보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되묻는 방법이 있다. 지금 이 불안은 영원한가. 지금 이 갈증은 영원한가. 지금 이 기쁨은 영원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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