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돌 Jan 13. 2023

몸의 관성은 원수인가 애인인가

그날은 새벽 3시가 되도록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줄거리가 잘 잡히지 않는 외국 영화가 상영 중이다. 세 남녀가 낭떠러지와 계곡이 깊은 밀림으로 여행을 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왜, 그 위험한 곳을 여행하는지. 가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키고는 있었지만 내 의식은 잠을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저걸 보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나의 시선은 계속 텔레비전 화면에 꽂혀 있었다.  

   

이럴 때는 통상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더운물로 갈증을 달래고 다시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킨다. 무엇엔가 홀린 듯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뭔가 엉킨 상태임을 알면서도 영상에 포박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상이 재밌어서도 아니다. 심지어 줄거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거리를 걸으면서, ‘아,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걷기를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경험한다. 잠자리에서 ‘아, 이제 일어나야겠어’, 하면서도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누군가는 자신을 호되게 채근한다. 한때는 나도 그런 자신에게 불신에 찬 신경질을 부렸었다. 이런 바보 같은! 하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만 해도 이런 몸의 관성은 탄성 좋은 생고무처럼 의지의 통제권 밖에서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심연에 내동댕이쳐진 상황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말을 하다가 ‘이쯤에서 그만해야지’하면서도 혀가 계속 무슨 소리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거나, 밥 먹다가, ‘이제 숟가락을 놔야지’ 하면서도 숟가락 놓자마자 젓가락질했던 자신을, 나중에야 알게 되곤 한다.

      

몸은 기억 없는 기억의 응집체이다. 의식이 호흡을 비롯한 몸뚱이의 움직임을 이끌어간다고 했지만, 몸은 의식이나 욕망, 의도 따위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무의식적 움직임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매만지는 물질이지만 변화의 현장을 적발할 대응 도구를 찾기 쉽지 않다. 변화를 봐야 할 눈도 몸이고, 매만지며 확인하는 손도 몸이기 때문이다. 몸은 몸으로써 마음을 따돌리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욕망하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의 현상만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몸 따로 마음 따로다. 몸의 일에 시간이 개입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 색깔이 변하고, 등허리가 굽어지고, 내장 기관 어딘가에 염증이 생긴다. 소화불량 따위를 소망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구도 예기치 않은 배앓이를 경험할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의 궤적을 기하학적 도면으로 만들면 어떤 그림일까. 처음에는 한 점에서 시작하다가 양변이 차츰 벌어지는 가위 모양이 될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당신의 마음과 몸은 차츰 간극이 벌어진다.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가 좁혀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간이 개입하기 때문인데, 시간에 대해서는 의지도 화장술도 성형술 따위도 속수무책이다.     


이러는 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늙음이 두렵다. 그 늙음을 통해 겪어야 하는 온갖 허약증, 치매, 불안증, 골다공증 따위를 헤아리는 마음이 아프다.    

  

이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답하자. 이러는 내 몸과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과 수용은 욕망을 삭감한다. 그 삭감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인정과 수용을 해보면 당신의 정신이 가벼워짐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정하자. 나의 노화가 빠르게 진행 중에 있고, 그 흐름을 타고 있으며, 오늘도 수천만 개 몸 세포가 북극의 빙하처럼 허물어지고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러함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가벼워지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당신의 삶 전체다. _()_

작가의 이전글 ‘평화’의 의미를 몸으로 쓰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