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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평화’의 의미를 몸으로 쓰는 법

수년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마음’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연출이 전혀 없을 순 없겠지만, 명상 초보자이기도 한 출연자는 서울의 명동 한 복판에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다닐 정도로 번잡한 곳이었다. 초보 명상가는 그 인파 속에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5분 정도가 지난 후, 그렇게 서 있었던 출연자의 반응은 이랬다. ‘인파 속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요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일상의 분주함이나 번잡함 속에서도 이런 체험이 가능하다니, 놀랍다.’  

    

명상 자세 혹은, 명상 환경이라고 할 만한 외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척추를 세우고 눈을 감거나 보는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시킨 상태다. 우리 일상의 자세는 그와는 반대에 가깝다. 앉은 상태에서도 척추가 구부려져 있거나 등뼈가 비뚤어져 있기 십상이다. 시선은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짧은 순간에도 검은 동공은 빠르게 좌우 왕복하고 위아래로 흔들린다. 눈빛이 그러하면 몸 또한 전반적으로 흐트러진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눈은 ‘눈, 코, 입, 귀, 피부.라는 몸의 다섯 감각기관 중에서 가장 바쁘고 멀리 움직인다. 인간 눈의 확장 범위는 수킬로 밖 사물도 분별해 낼 정도다. 보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봄으로써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이 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보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가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를 봄으로써 과거의 기억이 일어났거나 심리적 현상이 발생한다. 보지 않았으면 없을 일이다. 무엇보다도 눈의 역할은 원시 시절부터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장 의지할 만한 보호 장비였다. 대부분의 위험은 시각적 감지력을 통해서 드러난다. 소리나 냄새, 맛, 감촉 따위의 감각은 보는 행위보다 우선하기 어렵다. 현대인은 먹는 음식도 눈으로 보는 것에서 맛을 느끼기 시작하지 않던가.    

 

눈은 외부 공격이나 침투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기관 중에도 예민하고 민첩한 장기이다. 명상처럼 눈을 감는 행위는 그러므로 모든 방어 행위의 포기를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강한 눈빛은 물리적 공격력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그 눈빛의 이면에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서려 있기도 하다. 하지만 눈 뜬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음에도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공격이나 방어의지를 철수한 상태다. 눈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무장해제의 첫 순간이 바로 ‘눈 감기’ 혹은 ‘시선을 극도로 제한하기’이다.      


명상에서 눈을 감거나 시각을 좁히는 행위는 고요함으로 가는 핵심이다. 눈의 역할 비중 때문이다. 눈은 내 몸 밖 정보를 90프로나 받아들여 몸의 다른 기관들이 반응하게 하는 기관이다. 눈의 역할이 구십 프로다 보니 거의 모든 상행위가 고객의 눈을 소구 대상으로 삼아 접근하는 게 당연하다. 입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 몸에 바르는 것조차 일단은 고객의 눈을 현혹해야 한다.  

       

몸으로 표현하는 ‘평화’의 핵심 기관이 ‘눈’이라는 사실은 ‘지금’ 직접 시행해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잠들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만 챙긴 후 눈을 감아보라. 양손을 책상 위에 놓은 자세여도 상관없다. 잠시 다 내려놓고 쉬겠다는 의도로 눈을 감는다면 약 2분 후, 당신의 뇌파는 알파 상태가 된다. 소위, 창의력과 집중력의 순도를 높여 준다는 뇌파다. 잠듦과 깨어있음의 사이. 이른바 비몽사몽과 같은 의식의 아득한 지점에서 만나는 그 상태를 당신은 지금 즉시 만들 수 있다.  

   

지금 이 원고를 읽다가도 잠시 눈만 감으면 당신은 소위, 명상 상태와 접촉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평화로운 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평화’라는 표현에 어려있는 것이 있다면 ‘기품’이다. 그저 한적한 산촌의 맑은 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도 평화롭기는 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없다면 그저 자연 풍광일 뿐이다. 그와 같은 곳에 그 풍경에 걸맞은 당신의 태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기품이 서려 있는 존재의 땅이 된다.    

   

불교학자 김호귀는 저서 《禪과 좌선》에서 ‘양다리를 서로 엇갈려 모아 척추를 세운 후 눈을 감은 자세’ 자체가 일종의 종교적 경지라고 말한다. 이 자세는 몸으로도 취하고 마음으로도 취한다. 굳이, 종교 개념 성립을 위한 교주가 있어야 한다면 우주 천지가 교주다. 하늘을 향해 똑바로 앉고 몸을 안정시킨 후 눈을 감아 모든 공격과 수비의 마음을 해체하는 것이다. 몸으로 쓰는 평화라는 어휘는 이 자태에서 드러난다.   

    

평화는 욕망을 거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정좌 자세로 눈을 감는 행위는 욕망에 대한 주도적 시력 상실이다. 척추를 반듯이 펴는 것은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자의 당당함이다. 선악, 혼탁 불문하고 세상천지에 가득한 온갖 에너지에 대한 무방비 자세다. 이것이 평화의 본체다.    

  

척추를 펴고, 눈을 감을 것. 당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든, 당신이 앉아 있는 곳이 어디든 자신에게 사무칠 것. 손을 뻗어 잡히는 것부터 세상 우주 끝 어느 곳이든 당신의 의식이 닿는 시공간이 바로 ‘나’ 임을 잊지 말 것. 당신의 생각에 떠오른 지금 그 사람, 철천지 원수라도 바로 그 또한 내 마음이 일으킨 짧은 영상임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즉시 ‘평화’의 본체가 된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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