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뛸 수 있게 됐다.
러닝이 열풍이라더니, 직장 동료들의 권유로 꼬박 10년 만에 다시 뛰게 됐다.
다시 뛰기 전까지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항상
"저 연골이 다 나가서 의사가 뛰지 말래요.."라는 말을 10년째 반복해왔다.
10년 전, 매일 10키로씩 반 년을 꼬박 달렸다.
미국 인턴 근무 시절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한 극심한 알러지 반응과
크고 짜고 몹시 짠데 또 양도 많은 그 미국 음식의 향연 속에 길들여지다보니
살도 무럭무럭 자라 고3 이후 최대 몸무게를 찍었을 때였다.
알러지 반응은 참 서글프게도 살이 오지게 빠지지 않는 체질로도 만들었고
저질 체력에 항상 눈과 코에는 눈물과 콧물이 가득했다.
충혈된 눈에 뒤집어진 빨간 피부에는 여드름인지 두드러기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해
정말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또 어떤 알러지 반응인지는 모르지만 치아도 많이 좋지 않아 항상 치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가난한 유학생이라고 해야하나 인턴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가난한 20대 동양여자 아이는
그렇게 미국에서 병들어가고 있었다 나날히.
내가 지내던 곳은 뉴욕이었는데 항상 사람들이 달렸다.
계획도시인 탓에 일직선으로 쭉쭉 뻗은 도로는 달리지 않는 나도 달리고 싶게 만들었고
센트럴파크에 할랄가이즈를 들고 찾아 눕방을 하는 내게도 '뛰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끔 하는
묘한 매력의 도시였다.
반년동안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면서 이 강아지와 러닝을 좋아하는 뉴요커들은
10년이 지난 지금의 내 직장동료처럼 나를 계속해서 유혹했다.
'이래도 안 뛰고 싶어? 어?'
그래서 고3 최고 몸무게를 찍고 고4로 진화하려던 나는 타겟에 가 클리어런스 세일 코너에서
러닝화와 러닝복을 장만했다. 벌써 러너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퇴근 후 센트럴파크를 매일 뛰었다 10키로씩.
운동을 하지 않다가 또 몸이 많이 망가졌을 때 시작한 러닝이라 그런지
기록은 물론 쉬지 않고 뛰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으면서 짠했던 순간은
내가 울면서 뛰었다는 거다.
누구 하나 강요한 사람도 없었지만 망가진 몸이 슬펐고
무릎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근데 나는 뚱뚱하고 몸이 좋지 않고.
나도 저렇게 저 뉴요커처럼 가볍게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요령도 기술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그래서 붐~
한국에 돌아와서 곧장 병원을 향했고 나는 살이 더 찌지 않는 대신 연골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와 내과, 치과, 피부과, 정형외과 투어를 하면서 그 해에만
병원비를 천만 원을 썼다. 나중에 연말정산을 하면서 알게됐고 부모님께 굉장히 죄송했다
남들은 유학비로 몇 천만 원 쓴다고 하는데
난 내가 투잡해서 미국 비행기표도 사고 알아서 회사도 합격해오고 또 미국에 가서도 인턴 월급도 받으니
내 나름의 효도라고 생각했다.
근데 결과물은 몸도 마음도 얼굴도 흉측하게 망가진 딸이 1년 만에 돌아와
병원 투어를 하며 미국 대학 등록금만큼을 써버렸다는 사실.
뭐 아무튼 그렇다.
아무튼 내 러닝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많이 아파서 뛰었고 뛰니까 또 아파서 울면서 뛰었고 나중엔 아파서 안뛰었다 10년을
그러다가 다시 뛰게 됐다 10년 만에.
요즘은 아프지 않다 건강하다 즐겁다 행복하다.
그래서 그 기록을 하나하나 하고 싶다. 내가 건강해진 이유는... 아니지만
그냥 뛰면서 어떤 걸 느꼈고 10년 전과 어떤 게 달라졌는지.
다시 10년 후에 10년 만에 뛰었다고 글쓰지 않고 꾸준히 달리고 싶은 나의 기록이랄까.